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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서원 소개

<고산서원>
노사 기정진선생이 1878년(고종 15)에 정사(精舍)를 지어 담대헌(澹對軒)이라 하고 학문을 강론하던 곳입니다. 후손들이 1924년 중건하였으며, 1927년에 고산서원(高山書院)이라는 편액을 걸어 현재로 이어졌습니다. 최근까지 지속적으로 사당과 주변 담장, 보안시설 등을 보수하고 있습니다. 경내에는 강학공간에 외삼문·강당·거경재(居敬齋)·집의재(集義齋)가, 제향공간에 내삼문·고산사(高山祠)가 있습니다. 사당에는 기정진을 주향으로 이최선(李最善)·기우만(奇宇萬)·조의곤(曺毅坤)·김록휴(金錄休)·조성가(趙性家)·정재규(鄭載圭) 등 5위가 배향되어 있습니다. 1985년 설립한 장판각에 《노사문집(蘆沙文集)》 목판 980매와 《노사집》 12편(1질)을 비롯하여 많은 유물이 보관되어 있다. 고산서원은 1982년 10월 15일 전라남도기념물 제63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노사 기정진선생이 가장 오랫동안 살면서 저술활동을 하고 강학을 했던 중심지는 황룡면 하사리였다. 지금 행정구역으로는 황룡면 장산리이다. 65세 이후 20년 가까이 머물면서 여러 저술을 남기고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77세 때는 노령산(蘆嶺山) 아래의 하사에서 사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노사(蘆沙)’라는 호를 스스로 짓기도 했다. 

‘노문3자(蘆門三子)’라 일컫는 대곡 김석귀·일신재 정의림·노백헌 정재규를 비롯해 손자인 송사 기우만의 학문이 하사리 기정진의 문하에서 익어갔다. 면암 최익현이 대원군을 탄핵하다 반대파에 밀려 제주도로 귀양 갔다가 돌아오던 1875년 4월에 기정진을 찾았던 곳도 하사리이다. 또 훗날 유명한 지사 시인이 된 매천 황현이 15세의 어린 학동이던 때 기정진을 찾아와 학문을 물었던 곳도 이곳이었다.

70이 넘은 노학자를 황현이 찾은 때는 1869년이다. 당시 기정진은 그에게 시 세 편(贈黃玹三首)을 지어 주었는데, 그중 한 편이다. ‘보배로운 소년이 행전도 안 치고 찾아오니/ 놀랍기도 하지만 걱정도 되는구나/ 쉽게 얻은 것은 잃기도 쉬운 것이니/ 연잎 위의 물방울 구슬 자세히 보라.’ 

천재적인 시인 황현의 모습을 보고, 재주만 믿고 경솔할까 걱정되어 경계의 시를 지어준 것이다.

노사 기정진선생은 이곳에 머물다 마지막에는 고산리로 거처를 옮겨 지내다 별세했다. 궁핍 속에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그는 82세의 장수를 누렸다. 샘물처럼 솟는 학문적 의욕과 진리를 궁구하는 집요한 의지, 검소하고 절제된 삶 덕분이었을 것이다.

이런 기정진은 평소 근처 황룡강 등지에서 잡아 온 붕어와 거처 주변의 가죽나무 잎, 무청 등을 넣고 푹 끓인 붕어찜을 즐겼다고 한다. 붕어찜과 함께 주변의 죽순으로 만든 죽순나물도 즐겼다.

노사종가의 음식은 노사 기정진선생의 삶처럼, 채소와 나물 위주로 아주 담백하다. 종가에서는 지금도 손님상에 붕어찜을 비롯해 청국장, 집장, 죽순나물, 현미로 만든 인절미 등을 올린다.

영남일보. 2015.01.22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기우만 초상화> 64.0*106.0 채용신

호남에서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송사 기우만의 초상화로서 채용신이 그린 작품이다. 전면에 화기는 보이지 않으나, 1916년에 그린 것으로 전해진다. 송사 기우만(1846-1916)은 노사 기정진의 손자로서 당시 호남의 대표적 유학자로서 노사학파의 지원을 받아 장성향교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여러 차례 구금된 바 있다. 
 1909년에는 『호남의사열전』을 집필하였다. 이것은 의병이 사방에서 일어나 모두 패배하고 오히려 득세한 무리들이 의병을 ‘폭도’라 지목하고 사람들은 입에 올리는 것조차 꺼려하였기 때문에 머지않아 이들에 대한 기록이 남지 않게 될까 우려하여 그 기록을 전하는 일을 시급하게 여기었던 까닭이다. 유고집으로 『송사집』(1931)이 전하며, 1980년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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