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광주전남=정성환의 문화역사이야기14]
이번 문화역사이야기는 "학문으론 장성(長城)만 한 곳이 없다"는 '문불여장성(文不如長城)'의 주인공이자, 조선시대 성리학의 대가인 노사 기정진 선생의 의(義)로운 실천정신이 깃든 '장성 고산서원(長城 孤山書院)'편이다.
△ 노사 기정진(蘆沙 奇正鎭, 1798~1879)
전남 장성군 진원면 고산리에 세워진 고산서원은 노사 기정진 선생이 1878년 78세 때 이곳으로 이사한 후 정사(精舍)를 지어 ‘담대헌(澹對軒)’이라 이름 짓고 학문에 전념하며 후학을 양성하고 8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 곳이다.
1883년(고종 20) <노사집>이 간행되고 1910년(순종 4) 문간(文簡)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1927년 후손들이 고산서원이라는 편액을 걸어 중건했으며 1994년 사당과 주변을 보수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고산서원 공간은 외삼문, 강당, 거경재, 집의재, 내삼문, 고산사로 구성되어 있다.
사당인 고산사에는 노사 기정진을 비롯해 그의 제자인 김석구, 정재규, 정의림, 기우만, 조성가, 이최선, 김녹휴, 조의곤 등 아홉 분의 신위를 배향하고 있다.
문불여장성(文不如長城)이란 “학문으로는 장성(長城)만 한 곳이 없다”라고 뜻으로 흥선대원군이 조선 팔도 중 장성의 학문을 최고로 높이 평가했다.
이러한 평가는 장성 출신 노사 기정진의 높은 학문에서 연유하는데, 그 일화는 다음과 같다.
청나라 사신이 우리나라에 와서 조선의 학문을 시험하기 위해 “용단호장 오경누하 석양홍(龍壇虎長 五更樓下 夕陽紅)”이라는 글귀를 내놓고 이에 댓구(對句)를 맞추라는 문제를 낸다.
‘용단호장’은 ‘용은 짧고 호랑이는 길다’라는 뜻이고 ‘오경누하 석양홍’은 ‘깊은 밤중 누각 아래 석양빛이 붉다’라는 뜻으로 이치에 맞지 않는 문장이기에 아무리 유능한 조정의 대신들이지만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급기야 신동으로 명성이 널리 알려진 장성의 노사 기정진 선생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노사는 문제를 한참 동안 분석한 후 두 글은 모두 ‘해(日)’를 주제로 표현한 것임을 알아차리고 거침없이 “하원서방 구월산중 춘초록(畵圓書方 九月山中 春草綠)”이란 댓구(對句)를 쓴다.
“용은 겨울철에 해가 뜨는 시간으로 짧고, 호랑이는 여름철에 해가 뜨는 시간으로 길다”라는 뜻이며, 오경루는 중국에 있는 누각으로 석양의 경치를 노래한 것인데, 조선은 “구월산에 새로 돋아나는 봄풀이다”라는 뜻이다.
해를 그림으로 그리면 둥글고, 글로 쓰면 네모나다(日). 용호(龍虎)는 시간을 뜻하며, 용은 진시(辰時, 아침 7~9시경), 호랑이는 인시(寅時, 아침 3~5시경)이다.
이 명쾌한 문장을 본 청나라 사신과 조정의 대신들은 천재적인 해석과 답에 감탄했고, 철종 임금도 노사 기정진의 지식에 탄복하여 “장안의 많은 눈이 장성의 외눈만 못하다”라는 “장안만목 불여장성일목(長安萬目 不女長城一目)”이란 칭송의 말을 남겼다.
‘장성일목(長城一目)’은 당시 한쪽 눈을 잃은 노사 기정진 선생을 가리키는 것으로 ‘문불여장성(文不如長城)의 출처가 되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조선 성리학의 6대가로 추앙을 받았던 노사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은 1798년(정조 22) 전남 순창군 복흥면 조동에서 태어나 장성에서 자랐다.
본관은 경기도 행주, 자는 대중(大中), 호는 노사(蘆沙),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그의 가문은 주기론의 대표적 인물인 고봉 기대승을 배출한 호남의 명문인 행주 기씨이다.
기정진의 10대조는 기묘명현 기준의 둘째 형 기원이고 아버지 기재우는 장성군 하남에 거주했다.
그의 어머니는 금빛 얼굴을 가진 큰 사람이 남자아이를 안고 오는 꿈을 꾼 뒤 12개월 만에 그를 낳았다고 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뛰어난 지력을 소유한 천재였다.
4~5세에 이미 글을 터득하고 <효경>과 <격몽요결> 등을 독파했다.
판단력과 행실도 단정하여 이웃집 과일이 자기 집 마당에 떨어지면 모두 주워서 되돌려 주었다고 한다.
다섯 살 때 천연두를 앓아 왼쪽 시력을 잃었으나 10대 초반 이미 소학과 경서, 역사서를 통독했다.
그의 천재성은 일곱 살 때 지은 <영천 詠天, 하늘을 읊음>에서 수인선악보시속(隨人善惡報施速, 하늘은 인간의 선과 악에 따라 즉시 상을 내리고 벌을 준다는 뜻)이란 글을 썼다고 하니 일곱 살에 이미 세상의 이치를 터득한 천재였다 할 수 있다.
18세에 양친을 잃고 선대의 고향인 전남 장성 하남으로 이주하여 부모님의 삼년상을 치렀다.
가난한 선비였던 노사는 인근의 여러 고을을 전전하면서 장년기를 보냈다.
백양사 등의 산사에서 독서와 학문연구에 전념하여 부친의 유언에 따라 34세에 사마시(문과 소과)에 장원으로 합격했으나 대과에는 응시하지 않았다.
그의 관직 생활은 1842년 ‘전설사별제(정6품)’로 6일 근무한 것이 전부다.
높은 명성 때문에 사헌부 집의, 동부승지, 호조 참판 등 40여 차례나 벼슬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오직 학문에만 정진했다.
노사가 가장 오래 거주한 곳은 하사리(현, 장성군 황룡면 장사리)다.
65세 이후 13여 년을 이 넘도록 하사리에 정착하면서 제자를 양성하고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
하사리 노사의 문하에서 수학한 송사 기우만이 기정진의 손자이고, 15세의 학동이었던 매천 황현이 노사를 찾아와 학문을 수학했던 곳도 하사리다.
노사(蘆沙)라는 아호는 78세에 ‘노령산 아래 하사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이 무렵 지은 것이다.
특히 그의 학문은 스승으로부터 물려받거나 학맥에 의존하지 않고 중국 송 대의 성리학을 연구해 300여 년간 계속된 우주 현상을 이와 기로 설명하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극복하고, 인간의 심성과 도덕의 문제를 기(氣)가 아닌 이(理)의 작용으로만 가능하다는 그의 독창적인 이론을 정립했다.
“이(理)는 하나지만 수많은 형태로 나뉜다”.
모든 현상계의 작용은 기(氣)이지만 일체의 기(氣)의 작용은 이(理)의 명령에 따른 것이라며 “이가 기의 근원이며, 기발이 곧 이발이요, 기행이 곧 이행이다”라고 주장하고 이(理)에 절대성을 부여한 유리론(唯理論) 즉, 독창적인 이일분수설(理一分殊說)을 주장했다.
그의 이론은 이황과 이이의 사상을 뛰어넘어 기(氣)를 중시하는 주기론과 기(氣)의 존재를 일부 인정하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부정하고 독창적인 이(理)의 철학 체계를 수립한 것이다.
이러한 그의 독보적인 사상과 철학은 사단칠정을 논한 <우기 遇記>, 그의 핵심철학<납량사의 納凉私議>, <이통설 理通設>, 태극도설에 나오는 정(定)자에 대한 해설인 <정자설 定字說>, 80세에 발표한 <외필 猥筆>, 제자들과 문답을 기록한 <답문유편 答問類編> 등의 저서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남량사의, 納凉私議>는 여름에 피서가서 쓴 노사 선생의 논문으로 그의 주리론(主理論) 사상이 가장 잘 나타난 것으로 평가된다.
매천 황현은 이 글이 당시 학자들의 이론을 모두 뒤엎을 정도라고 격찬했다.
<이통설,理通說>은 율곡 이이의 이통기국설(理通氣局說)을 비판한 것으로, 이(理)에 절대성과 영원성을 부여하고, 인간과 사물의 모든 현상은 이(理)의 운동에 따라 이뤄지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황의 ‘이기호발설’을 인정하지 않았으나 이황의 ‘이발(理發)인정하고 율곡 이이의 기발(氣發)은 부정했다.
<외필 猥筆>은 별세하기 1년 전인 1878년에 작성한 ‘외람되게 쓴 글’이라는 저서로 운동하는 것은 기(氣)이지만 그렇게 만드는 것은 이(理)라고 주장했다.
그는 기(氣)의 자발성을 부정하고 이(理)의 절대성을 주장하며 이황과 함께 조선 성리학의 대표적인 인물인 율곡 이이의 주기론(主氣論)을 비판했다.
노사 기정진은 초야에 묻혀 강학과 저술에 몰두했으나 농민의 어려운 삶을 외면하지도 않았다.
1862년(철종 13) 진주민란을 시작으로 전국 각지에서 농민항쟁이 일어나자 그 폐해를 바로잡기 위해 <임술의책 壬戌疑策>을 써서 삼정(三政)의 폐단을 지적하고 이를 바로 잡을 방안을 제시하려 했으나 조정의 지시에 따라 상소할 것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는 임술년 농민들이 민란을 일으킨 이유를 “농민이 먹을 젖이 없어 우는 소리”라고 규정했으며 농민의 항쟁 이유를 삼정의 문란으로 판단하고 그 폐해를 바로잡을 것을 역설한 것이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1866, 고종 3)가 발생하고 조선은 총체적 난국에 시달렸다.
이에 노사 선생은 서양세력의 침략을 염려하고 현실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육조소(六條疏)라 불리는 첫 번째 <병인소>를 올렸다.
이 상소의 내용은 “나라 안에서는 정치를 제대로 하고, 나라 밖의 외적은 반드시 물리쳐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 상소는 외침에 대한 방비책으로 여섯 가지를 제시하면서 민족주체성의 확립을 주장한 것으로 당시 대원군의 수교통상거부정책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그 뒤 전개된 위정척사(衛正斥邪) 운동의 사상적 토대가 된다.
이후 두 번째 <병인소>를 올린다.
그 내용은 국가적 폐습을 준엄하게 비판하고, 지도층인 사대부에게 청렴결백한 기품이 없음을 우려해 삼무사(三無私)를 권장하도록 강조한 것이다.
‘삼무사’란 공자가 사심이 없는 세 가지에 대해 말한 것으로, 하늘, 땅, 해와 달처럼 사심이 없이 천하를 위해 봉사하는 일로써 지극히 공평한 것을 뜻한다.
위정(衛正)은 성리학적 질서이고, 척사(斥邪)는 타 종교사상의 배척한 것으로 중국의 화이사상(華夷思想)이 원류다.
이러한 사상은 세상을 우열로 양분하는 배타적 사상이라는 비판도 있었으나 망국의 위기 속에서 자주적 민족주의로 승화되어 조선 의병사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노사 선생의 손자 기우만과 종손 기삼연 등 일제에 항거한 ‘한말의병장’의 탄생은 노사 기정신 선생의 실천정신이 가져온 결과라 할 수 있다.
국가의 위기상황에서 노사 선생의 <임술의책>과 <병인소>는 현실적 문제를 바로잡으려는 실천의식의 발로이며, 행위와 실천이 없는 관념론적인 이론은 진리가 아니며, 자신이 옳다고 믿는 진리는 반드시 실천해야 하는 확고한 신념을 지닌 상소문이라 할 수 있다.
1876년 조선은 불평등 조약인 ‘병자수호조약’(강화도조약)이 일본의 강압으로 체결되자 노사 기정진은 아무런 힘도 되어주지 못한 자신을 한탄하며 붓과 벼루를 물리치고 절필하지만, 면암 최익현(1833~1906)이 도끼를 들고 궐문에 나아가 조약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는 소식을 듣고 “동방에 사람이 없다는 비웃음을 피할 수 있겠다”라며 기뻐하기도 했다.
이처럼 기정진과 최익현은 위정척사운동의 이론과 실천을 대표하는 성리학자였다.
이 상소 때문에 흑산도로 유배 간 최익현은 3년 뒤인 1879년 풀려나 장성의 담대헌(澹對軒)을 찾아 노사 선생을 예방하고 1901년에는 기정진의 ‘신도비문’을 짓는다.
조선왕조의 통치 이념인 성리학은 이론의 이상주의적 관념성 때문에 실천정신에 소홀했던 이유로 공리공론(空理空論)에 매몰된 학문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노사 기정진 선생은 성리학의 관념론에서 벗어나 조선 후기 시대적 문제를 고민하며 성리학의 이론을 몸소 실천한 탁월한 성리학자였다.
일본 제국주의에 나라를 빼앗기는 망국의 위기 속에서 그의 실천적 사상과 철학은 위정척사운동으로 승화되어 의병활동으로 이어졌다.
고려대학교 초대총장을 역임한 현상윤의 <조선유학사>에서 퇴계 이황, 율곡 이이, 화담 서경덕, 노사 기정진, 한주 이진상 선생을 조선 성리학 6대가로 기록하고 있다.
예조참판을 역임한 문장가 ‘김매순’은 노사 선생을 “본질과 응용이 구비 된 인물”로 칭송했으며, 구한말 유학자 이건창은 보성에 유배되었을 때 <노사집>을 읽고 “천하에 참다운 학문”이라고 격찬했다.
옐로시티 장성은 청백리의 주인공 관수정의 지지당 송흠을 시작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필암서원의 하서 김인후, 조선 성리학의 6대가 ‘고산서원’의 노사 기정진, 청백리를 상징하는 백비(白碑)의 주인공 ‘아곡’ 박수량, 화차를 발명하여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끌게 한 ‘봉암서원’의 ‘망암’ 변이중 선생 등 훌륭한 학자들을 배출한 청백리의 근원지이며 학문과 충신의 고장이다.
한국사에서 근대는 희망의 시기가 아닌 외세의 침략에 의한 혼란의 시기였다.
노사 기정진은 조선 성리학의 주리론(主理論)을 한층 더 심화시켜 성리학의 이상주의적 관념론에서 벗어나 위기에 처한 현실의 문제를 고민했다.
81세의 긴 생애 동안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면서 후학 양성을 하면서 제자들에게 “평소에는 학문에 열중하고 국가가 위기에 처할 때는 칼을 들라”는 실천을 강조한 위대한 사상가였다.
'문불여장성'의 근원인 노사 기정진 선생은 ‘담대헌’이란 명문사학을 만들어 600여 명의 제자를 양성했다.
노사 선생의 학풍은 후손과 제자들에 의해 6천여 명의 노사학파를 형성했으며, 그의 철학과 사상을 현재에도 계속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그가 얼마나 훌륭한 성리학자로 추앙받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격동의 근대화 시기에 성리학과 위정척사운동은 시류에 편승하지 못한 학문과 사상이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모든 인간은 시대적 조건과 한계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도 간과할 수 없는 문제인 것이다.
그는 조선 후기 외세의 침략에 굴하지 않는 위정척사(衛正斥邪)운동을 태동시킨 조선 성리학의 마지막 거장으로 평가받는다.
출처 : 투데이광주전남(http://www.todaygwangju.com)
2020-10-13 전남일보
철학자이자 고려대학교 초대 총장을 역임한 현상윤(1893~1950)은 그의 명저 『조선유학사』에서 조선 시대 유학자 중 대표적 인물로 퇴계 이황, 율곡 이이, 화담 서경덕과 그 뒤를 이은 녹문 임성주, 노사 기정진, 한주 이진상 등 여섯 분을 꼽았다. 그러면서 서세동점의 위기를 맞은 조선 왕조의 마지막 무렵에 성리학을 마무리한 진정한 세분의 성리학자로는 노사 기정진과 화서 이항로, 한주 이진상을 들었다. 이항로는 경기도 출신이고 기정진은 전라도 출신이며, 이진상은 경상도 출신이었다. 이항로는 기정진보다 6년 연상이고, 기정진은 이진상 보다 20년 연상이었다.
조선 성리학의 6대가로 칭송받았던 노사 기정진(奇正鎭, 1798~1879), 그는 1798년 전북 순창군 복흥면 조동(槽洞, 구수동)에서 태어나 장성에서 자란다. 본관은 행주, 호는 노사(蘆沙)다.
노사 기정진은 천재였다. 큰 선생 아래에서 글을 배운 적도 없는데, 4~5세에 이미 글을 해독하고 지을 줄 아는 아이였다. 그의 천재성은 7살 때 지은 '하늘을 읊음(詠天)'에서 들여다볼 수 있다. '사람들의 선악(善惡)에 따라 빠르게 보답한다네(隨人善惡報施速)'라는 글이 어떻게 7세 아동에게서 나올 수 있겠는가. 하늘은 인간의 선과 악에 따라 지체없이 상을 내리고 벌을 준다는 뜻이니, 7세에 이미 세상의 이치를 터득했다고 여기지 않을 수 없다.
부친의 유언으로 34세의 나이에 진사과에 장원하지만, 끝내 과거시험은 응시하지 않는다. 40여 차례나 나라의 부름을 받지만, 45세에 전설사(典設司) 별제에 6일 동안 근무했던 것이 벼슬의 전부였다. 가난에서 벗어나도록 60세에 고향 근처의 무장 현감 벼슬이 내리지만 거절한다. 그가 한평생을 바친 것은 후진 양성과 학문 연구였다.
고산서원 고산사에는 노사 기정진을 비롯하여 그의 제자인 김석구, 정재규, 정의림, 기우만, 조성가, 이최선, 김녹휴, 조의곤 등 9명이 배향되어 있다. 1960년 간행된 '노사선생연원록'이라는 '제자록'을 보면 노사에게 친히 글을 배운 제자가 600명이나 되고, 그들 제자의 제자까지 합하면 6000명이 넘는다. 노사와 이들을 노사학파라 부르는데, 그중 고산사에 배향된 8명이 수제자인 셈이다.
노사 학문의 정수는 누가 누가 뭐래도 높은 수준의 성리학이다. 46세에 『납량사의』, 48세에『정자설』, 56세에 『이통설』 그리고 81세에 그가 평생 연구한 이기론을 정리한 『외필』을 저술한다.『납량사의』와 『외필』은 그의 이(理)에 대한 철학사상의 핵심 저서다. 그는 인간을 포함한 우주만물을 생성·변화하게 하는 근원적 실재로서 기의 발동과 운행은 오직 이의 명령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기보다는 이를 절대시한 유리론(唯理論)의 주창이다.
'임술의책'과 '병인소'를 쓰다
임술년(1862)에 진주를 필두로 전국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나자, 그 폐해를 바로잡을 것을 역설한 상소를 올린다. 이것이 「임술의책」이다. 그는 「임술의책」에서 "민중 봉기를 일으킨 백성들은 어미의 젖을 잃고 우는 어린아이와 같다'면서 임술농민항쟁의 원인을 삼정의 문란으로 규정하고, 그 폐해를 바로잡을 5가지 개혁안을 제시한다. 지금 고산서원 입구에는 '임술의책'을 요약해서 새긴 비가 서 있다.
프랑스가 강화도를 침입한 병인양요(1866)가 일어나자 민족자존을 지키기 위해 상소를 올린다. 외침에 대한 방비책으로 쓴 6개 조항의 상소문인 「병인소」가 그것이다. 그 당시 대세는 외적과 싸우지 말고 화의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러한 주장에 노사는 결사반대한다. 전쟁을 위해 군비강화책을 열거한 후 나라 안에서는 정치를 제대로 하고, 나라 밖의 외적은 반드시 물리쳐야 한다는 척사론을 편다. 노사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외적과 싸워 물리쳤고, 노사에게는 공조판서라는 관직이 내려지기도 했다. 바로 그 상소가 노사 기정진의 이름은 전국에 알리는 상소였고, 최초로 척사위정의 이론을 온 국민에게 알린 글이었다.
이 상소는 이후 한말 위정척사 사상의 이론적 기초가 된다. 같은 시기 화서 이항로도 위정척사의 상소를 올리는데, 노사의 상소가 두 달이 빨랐다. 지금 장성 황룡면 그의 무덤 앞에 '위정척사기념탑'이 세워진 이유다.
'임술의책'과 '병인소'는 노사 기정진이 공리공담에만 머물렀던 성리학자가 아닌 철학의 이론을 정책으로 다듬어 제시한 실천적 학자였음을 잘 보여준다. '행동하는 양심'이었던 셈이다. 그의 손자 기우만과 종손 기삼연도 온 몸을 던져 일제에 항거한 한말의병장이었다.
노사 기정진 선생의 흔적을 찾다
오늘 장성에서 초·장년 시절, 노사의 흔적 찾기는 쉽지 않다. 순창군 복흥면 동산리, 일명 조동(槽洞, 구수동) 마을에서 태어난 후 18세 때 양친을 잃고, 고향 장성 아치실로 돌아오지만 오래 정착하지 못하고 인근의 맥동(麥洞), 매곡(梅谷), 탁곡(卓谷), 여의동(如意洞) 등지를 전전하며 장년기를 보냈기 때문이다.
기정진이 가장 오래 거주하며 제자를 기르고 저술 활동에 전념했던 곳은 하사리(지금의 장성군 황룡면 장산리)다. 65세 이후 13여 년을 정착했는데, 이때 노사라는 아호를 짓는다. 아호 노사는 '노령산 아래 하사리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하사리에 거처할 때인 1875년 4월, 대원군을 탄핵하다 제주도로 귀양 간 후 풀려난 면암 최익현이 노사를 찾아뵙는다. 그리고 1869년 어느 날 15살 신동이던 매천 황현이 하사리로 노사를 찾아온다. 황현은 그의 저서 『매천야록』의 맨 끝부분에 자신의 일생을 간략히 기술하면서 "15세에 노사 선생을 찾아뵈었더니 기특한 소년이라고 칭찬해 주었다"라는 내용을 자랑스럽게 적고 있다. 그러나 오늘 하사리에는 노사와 관련된 어떤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노사 기정진을 만나려면 78세 되던 1875년 겨울부터 생을 마치던 1879년 12월까지 '담대헌(澹對軒)'이란 강학소를 짓고 제자를 가르친 장성군 진원면 고산리를 찾아야 한다. 당시 강학소였던 담대헌 건물이 덩실하게 솟아있고, 그와 그 제자들을 기리는 '고산서원'이 있기 때문이다.
고산서원에는 노사와 그의 8대 제자들을 모신 고산사(高山祠)가 있는데, 사당에는 노사 선생 신위만 있을 뿐 영정은 없다. 노사 선생이 60이 넘자 문인 오상봉이 초상화를 그리자고 청하지만, 얼굴이 추하다는 이유를 들어 고사한다. 그 뒤 김석구 등 제자들이 재차 청하였지만 노사는 극구 사양하며, "주검은 기(氣)와 함께 소멸하는 데 무엇 때문에 다시 모습을 세상에 남길 것인가"라며 거부한다. 유리론자(唯理論者)답다. 영정이 없는 이유다.
고산서원의 강당 담대헌 마루에 오르면 툭 터진 남쪽으로 무등산이 아스라이 보인다. 그곳에 노사 부모님의 무덤이 있다. 노년에 성묘하기도 어려워 불효막심한 자신을 책하던 무렵 그곳으로 이사와 부모님 묘소를 담담하게 바라볼 수 있어 '담대헌'이란 이름을 걸었다고 한다. 이곳 담대헌에도 유명인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조·일수호조규(병자수호조약)을 결사 반대하다 흑산도로 유배 갔던 최익현이 해배되자, 1879년 3월 또 담대헌을 찾는다. 노사가 죽기 10달 전이다. 노사가 세상을 뜬 이후에는 손자 기우만이 담대헌의 주인이 되어 중암 김평묵과 영재 이건창 등 당시 내로라하는 학자들을 맞이한다.
고산서원에 노사의 학문이 남아 있다면, 그의 무덤에는 혼이 남아 있다. 노사의 혼이 남아 있는 무덤은, 지금 행정구역으로 장성군 동화면 남산리 황산 마을 뒷산에 있다. 뒷산에 오르면 가장 먼저 마주치는 것이 전국의 유림들이 성금을 모아 세운 노사 선생 신도비다. 정말 크고 우람하다. 평소 노사를 흠모하여 두 번이나 찾았던 최익현이 글을 짓고, 서예가 여초 김응현이 글씨를 썼다.
조금 더 올라가면 소나무 숲 안에 노사의 무덤이 있다. 그런데 무덤 앞에 '위정척사기념탑(衛正斥邪紀念塔)'이 서 있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1876년 프랑스 군대가 강화도를 침범할 때 위정척사의 논리를 설파한 '병인소(丙寅疏)를 올리는데, 이항로의 상소보다 두 달이 빠른 전국 최초였기 때문이다.
노사의 무덤 주위 소나무가 정말 멋있다. 마치 날씬한 호위병 같다. 무덤은 호떡을 엎어 놓은 듯 봉분이 낮아 마치 평장한 모습처럼 보여 특이하다. 무덤 앞에는 두 개의 비가 서 있다. 왼쪽에는 "조선노사기선생지묘 증정부인울산김씨부좌"라고 새긴 묘비가 서 있고, 오른쪽에는 노사의 제자 중 영남 출신으로 큰 명성을 떨친 정재규가 지은 묘갈명을 새긴 비다. 함께 잠들어계시는 울산김씨는 하서 김인후의 후손이다. 제자 정재규는 묘갈명에 "하늘이 우리의 도를 도와 선생을 낳으셔, 정기를 모아 진실로 대성하셨네(天相斯道 正氣之會 展也大成)"라고 쓴다. 노사 기정진의 높은 학문의 완성을 기리고 찬양하고 있다. 제자의 스승 사랑이 장엄하고 아름답다.
<무등일보> 2020.09.14.
시대의 문제를 고민했던 성리학의 마지막 거장, 기정진
내가 말을 타고 간다. 내가 가는 것인가, 말이 가는 것인가? 여기에는 가려는 것과 가는 것이 있다. 가려는 것이 이(理)이고, 가는 것은 기(氣)이다. 퇴계는 내가 이고, 말은 기라고 했다. 방에 노트북과 오디오가 돌아간다. 이것을 작동시키는 것은 전기다. 전기가 이가 되고, 작동되는 기기는 기라 할 수 있다. 이는 질서이고, 기는 운용이다. 성리학은 이기(理氣)로 우주와 인간을 설명하고 싶었다. 선악(善惡)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선이다. 천지만물에 공통하는 본성이므로 절대 선이다. 기는 선도 있고 악도 있다. 기는 상황에 따라 맑음과 탁함(淸濁), 온전함과 치우침(偏全)의 차이가 있다. 이는 보편성, 기는 특수성이다. 사람은 본래 선하지만 환경에 따라 선하기도, 악하기도 한다. 주희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이다.
사람에게는 성정(性情)이 있다. 성은 미발(未發)이고, 정은 기발(旣發)이다. 정에 사단칠정이 있다. 사단(四端)은 인의예지(仁義禮智)로 가는 길이다. 아이가 우물로 기어갈 때 타산 없이 구해주는 측은한 마음이 인의 단초다. 부끄러운 마음이 의, 사양하는 마음이 예, 시비분별이 지의 시작이다. 칠정은 희(喜)·노(怒)·애(哀)·구(懼)·애(愛)·오(惡)·욕(欲)이다. 퇴계 이황은 '사단은 이가 발현한 것이요, 칠정은 기가 발현한 것(四端理之發 七情氣之發)'이라고 했다. 이 말의 핵심은 사단과 칠정은 다르다는 것이다. 둘은 별도로 존재한다. 사단은 절대 선이며, 고귀하고, 도심(道心)이며 이가 주체다. 칠정은 선악이 섞여있으며, 비천하고, 인심(人心)이며 기가 주체다. 반면 고봉 기대승은 사단과 칠정은 다르지 않다고 주장한다. 사단은 별도로 존재하지 않으며, 칠정 속에 있다. 칠정이라는 감정 속에 선악이 혼재하는 것이지, 그것을 나눌 수 없다는 입장이다.
퇴계는 이기가 각각 발하여(理氣互發說), 둘은 섞일 수 없다(理氣不相雜)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이다. 고봉은 이기가 함께 발하여(理氣共發說), 둘은 떼어낼 수 없다(理氣不相離)는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이다. 이것이 유명한 사칠 논변이며, 조선 철학사상사의 백미를 장식한 '퇴고논쟁(退高論爭)'이다. '어찌 물속의 달에 밝음과 흐림이 있는 것이 모두 달의 작용이며 물과는 관계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나는 달의 그림자가 고요하고 맑게 흐르는 물에 비친 경우에는 비록 달을 가리켜 그것의 일렁임을 말하더라도 물의 일렁임이 그 안에 있다…' 고봉의 편지는 이런 빛나는 은유와 간결함, 깊은 철학적 사유, 논리적 명료함, 젊음의 열정 등이 곳곳에서 묻어나는 명문이다. 퇴계는 주자의 토대 위에서 성리학을 더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고 싶었다. 때는 16세기 후반, 사화와 당쟁, 음모와 살육이 절정에 달하던 때다. 높은 도덕률이 필요했다. 칠정이 난무하는 진흙탕의 인간세상, 그것을 구원하기 위한 사단이라는 도의 경지. 인욕의 절제와 수양을 통해 도달해야 하는 절대 선의 세상을 별도로 설정하려고 했다. 철학의 궁극적 지점, 그것은 아마도 신성(神性)일 것이다. 영원불멸의 어떤 신성한 것, 그것이 있는가? 농부철학자 윤구병 선생은 '있음'에서 출발한 것이 기독교이고, '없음'에서 출발한 것이 불교라고 구분 한 바 있다. 퇴계는 인성 속에서 신성을 찾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칠정의 범속한 감정을 초월하는 사단의 고결한 영역, 인간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순선(純善)의 경지, 그것은 따로 존재하며, 그곳에 가야한다. 그것이 그의 이상이며 유학을 유교로 끌어올리는 새로운 매트릭스(matrix)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퇴고논쟁은 퇴계를 이은 우계 성혼, 고봉을 이은 율곡 이이의 '율우논쟁(栗牛論爭)'으로 심화 발전한다. 전자는 주리론으로 영남학파, 후자는 주기론으로 기호학파를 형성한다. 이기론은 조선의 학자치고 여기에 붓을 들지 않은 학자가 없을 만큼 조선 철학사의 양대 산맥이며 최대 쟁점이었다. 이 논쟁은 조선후기 들어 더욱 극단화하는 유리론(唯理論)과 유기론(唯氣論)으로 나뉜다. 그 즈음 혜성처럼 등장하는 또 하나의 거목이 있었으니, 300여년에 걸친 이 논쟁을 극복하고 독창적인 이(理)의 체계를 수립한 노사 기정진(1798~1879)이다.
청나라에서 사신이 왔다. 사신이 시 한 구를 내보이며 댓구(對句)를 청하였다. 실력을 떠보는 것이다. '용단호장(龍短虎長 五更樓下夕陽紅)' 용은 짧고 호랑이는 길다? 관료들이 머리를 맞대어도 알 수가 없다. 급기야 신동으로 이름난 기정진을 찾는다. 그는 담박에 댓구를 쓴다. '화원서방(畵圓書方 九月山中春草綠)' 그리면 둥글고 글로 쓰면 모가 난다? 선문답 같다. 용호는 시간이다. 용은 진시(辰時), 오전 7시 즈음. 호랑이는 인시(寅時), 새벽 5시 무렵이다. 용은 겨울 해 뜨는 시간으로 겨울 해는 짧다. 호랑이는 여름 해 뜨는 시간으로 여름 해는 길다. 답은 해다. 해는 그리면 둥글고(⊙), 글씨로 쓰면 모가 난다(日). 이 명쾌한 답을 들고 갔더니 놀라지 않은 이가 없었다고 한다. 그 때 '장안의 많은 눈들이 장성의 외눈만 못하다(長安萬目不如長城一目)'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그것이 '문불여장성 (文不如長城)'의 출처라는 재미난 일화다.
기정진은 순창에서 나서 장성에서 자랐다. 6세에 천연두를 앓아 왼쪽 눈을 잃었다. 그는 기억력이 좋아 보는 것은 모두 외웠다고 한다. 10대 초반 경학서와 역사서까지 두루 통독했다. 1831년 33세에 사마시에 장원을 차지했다. 그의 관직생활은 1842년 전설사 별제로 6일 근무한 것이 전부다. 사헌부 집의, 동부승지, 호조참판 등 여러 벼슬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오직 학문에만 정진했다. 그는 사승(師承)이나 학맥에 의존하지 않고 성리학의 독자적인 지평을 열었다. 주요 저작으로 40대에 쓴 '납량사의', 50대의 '이통설(理通說)', 그리고 80세에 발표한 '외필(猥筆)' 등이 꼽힌다.
그는 이(理)를 씨앗에 비유했다. '이 세상에 씨앗 없이 생겨난 것은 아직 없었다. 리여! 리여! 모든 것의 씨앗이로다!'라고 했다. "이가 기의 근원이며, 기발이 곧 이발이요, 기행이 곧 이행"이라 했다. "음양 동정이 겉으로는 자행자지(自行自止)하는 것 같으나 살펴보면 오직 천명이고, 그것은 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기존의 이론들을 비판 종합하면서 유리론(唯理論)이라는 독창적인 영역을 정립했다.
1866년 병인양요는 서양의 첫 침입이었다. 그의 나이 68세. 그는 '병인소(丙寅疏)'라 불리는 여섯 항의 상소를 올린다. 조정의 계획을 미리 세우고, 널리 의견을 구할 것, 외교언사를 세련되게 하고, 군사를 조련하며, 내부정비를 통해 외침에 대비할 것 등의 내용이다. 나라가 기우는 병자수호조규(1876)로부터 10년 전, 을사늑약(1905)으로부터 40년 전이다. 이 소(疏)가 한말 위정척사(衛正斥邪) 사상의 뿌리다. 위정은 성리학적 질서이고, 척사는 타 종교사상의 배척이다. 중국 화이사상(華夷思想)이 원류다. 세상을 우열로 양분하는 배타적 보수적 사상으로 분명 비판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망국의 문전에서 이 사상은 자주적 민족주의로 승화되었고 훗날 기삼연이 의병의 깃발을 세우고 민중의 항일운동을 점화하는 한말 조선의병사의 사상적 기반이 되는 것은 틀림없다.
기정진은 끝까지 붓을 놓지 않았다. 81세의 긴 생애 동안 벼슬하지 않고 오직 학문에만 몰두한 학자였다. 78세이던 1875년 오늘의 '고산서원'이 있는 장성군 진원면 고산리로 이사하여 그곳에 담대헌(澹對軒)을 짓고 1879년 생을 마치던 날까지 책을 쓰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의 학문을 이은 노사학파가 6천여 명에 이른다. 서경덕, 이황, 이이, 임성주, 이진상과 더불어 조선 성리학의 6대가로 꼽힌다. 그는 비가 내리되 비를 맞지 않는 공리공담(空理空談)의 관념론에서 벗어나 온 몸으로 비를 맞으며 시대적 문제를 고민했던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노사 기정진을 조선 성리학의 마지막 거장으로 평가하는 것은 바로 그 점이다. 글=이광이 시민전문기자·그림=김집중
글 : 이광이
언론계와 공직에서 일했다. 인(仁)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애인(愛人)이라고 답한 논어 구절을 좋아한다. 사진 찍고, 글 쓰는 일이 주업이다. 탈모로 호가 반승(半僧)이다. 음악에 관한 동화책과 인문서 '스님과 철학자'를 썼다.
그림 : 김집중
호는 정암(正巖)이다. 광주광역시 정책기획관 등 공직에서 30여년 일했다. 지금은 고봉 기대승선생 숭덕회 이사로 활동하면서 틈틈이 강의도 한다. 고교시절부터 한국화를 시작하여 끊임없이 작업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