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column

성리학, 몸으로 실천한 철인(哲人)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上

  • 1노사 기정진(蘆沙 奇正鎭 : 1798~1879)은 희대의 철학자이자 철학의 이론을 몸으로 실천했던 탁월한 성리학자였다. 조선왕조의 통치이념이자 학문의 주조(主潮)이던 성리학은 높은 이론의 관념성 때문에 실천과 실행이 어려웠던 이유로 공리공론이라는 비판을 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조선왕조 말기에 혜성처럼 나타난 몇몇 높은 수준의 성리학자들 때문에 성리학은 공리공담(空理空談)이라는 비판에서 벗어나 망국의 무렵에 나라사랑의 뜨거운 의병운동으로 승화되었다. 그런 운동의 사상과 철학을 제공한 대표적 성리학자가 바로 노사 기정진과 화서 이항로(1792~1868)였다. 

    전남 장성군 진원면 고사리에 있는 ‘고산서원’. 노사 기정진은 78세때 이곳으로 이사와 4년간 학문을 마무리하고 제자들에세 도를 전한 뒤 세상을 떳다. |사진작가 황헌만 

    더구나 노사 기정진은 유리론(唯理論)이라는 최고수준의 주리론(主理論)에 근거하여 행위와 실천이 없는 관념적인 이론은 진리일 수 없다는 확고한 신념을 지닌 학자였다. 자신이 밝혀내고 찾아낸 진리는 몸으로 실천해 보여야만 그 참뜻이 있다고 믿고, 82년의 평생 동안 가장 겸허하고, 가장 순수한 학자로서의 자세와 처신을 잃지 않았다. 마음과 몸으로 벼슬살이를 멀리하고 오로지 진리탐구에만 일생을 바쳐, 참으로 높은 수준의 성리학 이론을 터득해낸 대표적인 성리학자였다. 

    ‘조선유학사’라는 저서로 유명한 현상윤(玄相允)은 그의 저서에서 몇백명에 이르는 조선시대의 성리학자 중에서 그래도 학자다운 학문을 이룩한 학자로 여섯 분을 꼽았는데, 퇴계·율곡·화담을 이은 학자로 녹문 임성주와 노사 기정진, 한주 이진상을 거명하였다. 그러면서 서세동점의 위기를 맞은 조선왕조의 마지막 무렵에 진정한 세분의 성리학자로는 노사와 화서 및 한주를 들면서 그분들의 업적으로 성리학의 역할이 그런대로 마무리되었다는 주장을 폈었다. 대체로 옳은 판단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화서는 경기도 출신이고, 노사는 전라도 출신이며 한주는 경상도 출신이었다. 화서는 노사보다 6년 연상이고 노사는 한주보다 20년 연상이지만, 나라가 기울기 시작하던 무렵의 비슷한 시기가 세 학자들의 생존 기간이었다. 서로의 정보교환이나 연락도 없었으면서도, 주리(主理)라는 큰 틀의 이론에 뜻을 같이 하였고, 위정척사의 논리에도 큰 차이 없이 망해가던 나라에 우국(憂國)과 애국(愛國)의 불꽃을 피우게 하였던 점도 큰 차이가 없었으니, 바로 그 시대를 이끌던 진운(進運)에 세 학자들이 앞장선 셈이었다. 


  • 2-노사의 탄생- 

    노사 기정진은 정조22년인 1798년 지금의 순창군 복흥면 동산리, 일명 조동(槽洞:구수동)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해 6월 3일 해가 질 무렵이었다. 본디는 아버지 기재우(奇在祐)가 장성군 하남에 거주했으나 임시로 살아가던 구수동에서 태어났으니, 탄생지야 순창군이지만 선대 때부터 살아가던 장성을 고향으로 여길 수 있다. 어린 시절에도 고향인 장성의 하남을 찾은 적이 많았고, 친족들이 대부분 하남에 있었기에 왕래가 잦았다. 더구나 18세에 양친을 잃고 외로운 신세가 되자, 바로 고향인 하남으로 돌아와 그곳을 중심으로 해서 일생을 보냈으니 그곳이 고향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남은 지금의 지명으로는 전남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阿谷里)인데, 그때는 아치실, 즉 아곡(鵝谷)으로 불렀다. 그 아치실은 기씨 이전에 박씨의 마을인데, 한창 잘 나가던 시절에는 ‘아치실 기씨’라는 호칭이 나도록 떵떵거리며 살던 기씨의 명촌이었다. 지금은 노사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거의 폐허가 된 마을이 되고 말았다. 

    가난한 선비의 생활에 넉넉한 삶을 살아가지 못한 노사는 아치실에서도 오래 정착해서 살지 못하고 그곳과 멀지 않은 맥동(麥洞), 매곡(梅谷), 탁곡(卓谷), 여의동(如意洞) 등지를 전전하면서 장년기를 보냈다. 그러던 중에도 마을에서 멀지 않은 산사인 관불암(觀佛菴), 남암(南菴), 백양사 등의 절에서 골똘히 독서하면서 학문연구에 여념이 없었다. 

    -면암 최익현과 매천 황현이 찾았던 하사리- 

    노사가 가장 오래 거주하면서 저술활동과 강학을 했던 중심지는 하사리였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장성군 황룡면 장산리(長山里)다. 65세 이후 20년이 넘도록 정착하면서 높은 학문과 사상으로 무장한 사상가 노사는 그곳에서 수많은 저술을 남겼고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그래서 77세 때인 노경에야 노령산(蘆嶺山) 아래의 하사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노사(蘆沙)라는 자호로 부르고 ‘노사설(蘆沙說)’을 지어 저간의 입장을 설명하였다. 노문3자(蘆門三子)라 일컫는 대곡 김석귀, 일신재 정의림, 노백헌 정재규를 비롯하여 손자인 송사 기우만은 그들의 학문이 바로 하사리 노사의 문하에서 익어갔었다. 당대의 의기남아 면암 최익현(崔益鉉)이 대원군을 탄핵하다 반대파에 밀려 제주도로 귀양갔다가 해배하던 1875년 4월에 노사를 찾아뵙던 곳도 하사리이다. 또 15세의 어린 학동(學童)이던 뒷날의 유명한 지사(志士) 시인이던 매천 황현(黃玹)이 15세의 어린 나이로 노사를 찾아와 학문을 물었던 곳도 바로 하사리였다. 70이 넘은 노학자를 황현이 찾은 때는 1869년의 어느 날이니, 그때 노사는 신동이던 어린 황현을 보고 경계의 시 세편을 지어주었다. 

    보배로운 소년이 행전도 안 치고 찾아오니 
    놀랍기도 하지만 걱정도 되는구나 
    쉽게 얻은 것은 잃기도 쉬운 거니 
    연잎 위의 물방울 구슬 자세히 보라 
    (贈黃玹三首) 

    천재적인 시인 매천의 모습을 보고 재주만 믿고 경솔할까 걱정되어 경계의 시를 주었다. 그래서 매천도 그의 유명한 ‘매천야록’의 맨 끝 부분에 자신의 일생을 간략히 기술하면서 “15세에 노사선생을 찾아가 뵈었더니 기특한 소년이라고 칭찬해주었다”라는 내용을 자랑스럽게 적고 있다. 하사리는 지금 흔적이 없다. 

  • 3-중암 김평묵과 영재 이건창이 찾았던 고산리- 

    이유야 알 수 없으나, 78세의 노인 노사는 그해 겨울에 오늘의 ‘고산서원(高山書院)’이 있는 장성군 진원면 고산리로 이사와 마지막으로 학문을 마무리하고 제자들에게 도를 전한 뒤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노사는 1875년 겨울에 이사와 1879년 12월 29일 생을 마치던 날까지 4년이 넘도록 ‘담대헌(澹對軒)’이라는 강학소를 짓고 거기에서 거처하면서 학술서적을 저작하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아치실이나 하사리는 노사의 흔적도 전해주지 못하지만, 이곳 ‘담대헌’의 건물은 덩실하게 솟아있고, ‘고산서원’이 우람하게 서 있어서, 노사의 유적지는 이곳에 이르러야만 명확하게 찾아볼 수 있다. 

    지금은 ‘고산서원’의 강당으로 사용되는 담대헌, 마루에 올라 앉아 있노라면 툭터진 남쪽으로 아스라이 광주의 무등산이 보이고, 무등산 자락의 장망봉도 희미하게 보이는데, 그곳에는 노사의 부모님 묘소가 있다. 노년에 성묘하기도 어려워, 불효막심한 자신을 책하던 무렵, 그곳으로 이사와 부모님 묘소를 담담하게 바라볼 수 있기에, ‘담대헌’이라는 이름을 걸었다는 것이다. 참으로 노년기의 작품인 ‘담대헌기’에는 그의 간절한 부모님 생각이 은은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곳 담대헌에도 명인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병자수호조약(1876)을 결사반대했던 최익현은 흑산도로 귀양갔다가 1879년 3월 해배되어 귀경하던 때에 병중에 신음하던 노사를 담대헌으로 찾아뵈었다. 도를 듣지 못하고 얼굴만 뵙고 떠나던 면암은 시를 지었다. 

    도학(道學)이 남쪽 고을에 있어 성망이 무거운데 
    공자처럼 사모한 사람 누구이던가 
    두 번째 찾아왔으나 도 못 듣고 얼굴만 뵈오니 
    50 되도록 배움 없는 사람 후생이 부끄럽네 
    (‘拜蘆沙奇丈’) 

    노사에게 도를 얻어듣지 못한 아쉬움을 토로한 면암의 시는 노사의 학덕이 어느 정도로 높았나를 간접적으로 설명해주고 있다. 

    노사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담대헌은 적막하지 않았다. 노선생이 세상을 떠난 뒤, 소선생(少先生)인 노사의 손자 송사 기우만이 담대헌의 주인이 되어 학자들을 맞이하였다. 1884년 12월 척사위정운동을 주도하다 전남 무안의 지도(智島)로 귀양갔다 돌아가던 당대의 학자 중암 김평묵이 노사의 유촉을 찾아 담대헌을 방문하였다. 화서 이항로의 수제자로 노사의 학문이 스승의 학문과 같은 내용이라며 극구 찬양하던 김평묵은 송사 기우만과 몇 밤을 새우며 ‘노사집’을 읽어가자 숭모의 정을 금치 못했다. 뒷날 노사의 주저(主著) ‘외필(猥筆)’이라는 글에 찬양의 발(跋)을 담았던 사람도 김평묵이었다. 

    그 뒤 1895년의 어느 날, 전남 보성으로 귀양갔다가 해배되어 돌아가던 희대의 문장가 영재 이건창(1852~1898)은 노사 학문의 보금자리인 담대헌을 찾았다. 송사 기우만과 함께 밤을 새우며 ‘노사집’을 읽어가던 영재는 노사의 깊은 학문에 탄복하면서 아낌없는 찬양의 시를 지었다. 

    ‘납량사의’ 읽으며 마음 기울인 지 오래더니 
    담대헌에 오르자 사모의 정 새롭도다 
    사방을 둘러 싼 고산(高山)은 공경의 뜻 더 일고 
    성긴 대밭에서는 가난이 흐르는구나 
    정밀한 마음으로 얻어낸 도는 옛 사람을 능가하고 
    박학(樸學)으로 가문 이은 손자가 있네 
    탄식하노라 오늘의 만남 어이 쉽게 얻으리 
    돌아가서는 당연히 이야기 진진하리라. 
    (노사선생 고택을 지나며 손자 송사와 함께) 

    예나 이제나 가난한 노사의 집안, 가난이 흐른다는 대밭만 지금도 성긴 모습으로 대바람 소리만 내고 있었다. 

    한말의 거유이자 의기의 사나이들인 면암 최익현, 중암 김평묵, 영재 이건창 등이 찬양해마지 않던 노사의 학문. 그들의 찬양이 있었기에 외롭지 않게 ‘고산서원’의 우람한 모습이 호남학을 상징해주고 있다. 


    박석무(한국고전번역원장)

성리학, 몸으로 실천한 철인(哲人)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下

  • 1최초의 척사위정 주장…국시로 세우다 

    노사 기정진은 성리학사에서도 독특한 이론을 전개하여 가장 철저한 주리론(主理論)의 제창자이자, 견고한 일원론으로 유리론의 체계를 세워, 아무도 넘볼 수 없는 학문영역을 개척한 학자였다. 

    노사 기정진의 묘소와 묘전비. “하늘이 우리의 도를 도와 선생을 낳으셔, 정기를 모아 진실로 대성하셨네”라는 비문은 제자 정재규가 썼다./ 사진작가 황헌만 

    -노사학파의 형성- 

    노사의 학문과 그 제자들을 노사학파라 부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노사 자신의 학문이 매우 독특한 데다, 그의 문하에서 배출된 걸출한 학자들이 집단을 형성하여 노사학문을 고수하고 전파하여 하나의 학파를 형성하기에 충분한 때문이다. ‘고산서원’에는 노사를 주벽(主壁)으로 모신 신실(神室)인 고산사(高山祠)가 있고, 강당으로 담대헌이 있고, 동쪽으로 동재(東齋)인 집의재(集義齋)가 있고, 서쪽으로 서재(西齋)인 거경재(居敬齋)가 있다. 담대헌과 거경재 사이에는 노사문집의 목판본을 보관한 장판각(藏板閣)이 있다. 담대헌 남쪽에는 우람한 3간의 정문이 있으며 정문 밖 동편에는 서원의 관리사가 볼품있게 서 있다. 

    신실인 고산사에 배향(配享)된 제자 학자들의 면면이 바로 노사학파의 거장들이다. 우선 노문3자인 대곡 김석귀, 노백헌 정재규, 일신재 정의림 수제자 세 분에, 손자인 송사 기우만까지 네 분의 학자가 모셔져 있고, 또 다른 네 분의 학자들이 연달아 자리하고 있다. 월고 조성가, 석전 이최선, 신호 김녹휴, 동오 조의곤이 그들인데 모두가 당당한 학자들이었다. 1960년에 노사의 후학들에 의하여 간행된 ‘노사선생연원록’이라는 제자록에 의하면 친히 글을 배운 제자가 600여명에 이르고, 그들 제자의 제자들까지 합하면 6000여명에 이르는 대학단이 형성되었다고 여겨진다. 배향된 8명은 그 중에서도 대표자였다. 


  • 2- ‘납량사의’와 ‘외필’- 


    노사 선생의 묘소 곁에 최근에 세운 척사위정탑. 
    노사 학문의 정수(精粹)는 누가 뭐라 해도 높은 수준의 성리학이다. 그런 성리학의 대표적 저술은 ‘납량사의(納凉私議)’와 ‘외필(猥筆)’이다. 46세의 왕성한 장년기의 저작인 납량사의는 그 당시 논쟁의 중심에 있던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에 대한 새로운 차원의 주장이다. 이기(理氣)를 이원론(二元論)으로 잘못 해석하여 인(人)과 물(物)의 성에 대한 이동(異同)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유리론, 즉 이(理) 하나일 뿐이라는 일원론(一元論)의 입장인 노사는 인물성동이론의 어떤 것도 반대하면서 자기대로의 유리론을 주장하였다. 

    죽음을 몇 달 앞둔 81세의 말년에 저작한 ‘외필’은 주기론(主氣論)을 철저히 배격하느라 율곡 이이의 학설에도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 이기론으로, 뒤에 큰 파란을 일으킨 논문인데, 기(氣)란 이(理)의 대칭일 수 없는, 이(理)의 예속물이라고 설명하여 새로운 이기론을 세운 학술이론이었다. 치밀했던 노사는 46세 때의 저술인 ‘납량사의’를 77세 때에 다시 수정하여 새로운 이론을 보강하였고, 81세 때의 ‘외필’은 죽음이 임박한 때에 저술하여 당대의 석학들인 김석귀, 정재규, 정의림 등 세 제자에게 보여준 뒤 그들도 의심 없이 독실하게 믿겠다는 약속을 받은 뒤에야 세상에 내놓았던 글이었다. 80평생 가슴 속에 품고 있던 학문이론을 더 이상은 감출 수가 없기에 어쩔 수 없이 밖으로 알리지 않을 수 없어 사람들에게 보인다는 참으로 겸손하고 신중한 자세로 자신의 학설을 주장하던 모습이었다. 


  • 3-병인양요에 올린 상소- 

    공리공담의 성리학을 뛰어넘어 깊숙이 연구해낸 성리학의 높은 학문을 실천으로 옮긴 학자가 기정진이었다. 69세이던 병인년에는 병인양요라는 전대미문의 난리가 일어났던 해다. 서양의 군대가 강화도를 침범하면서 세상이 요동칠 때, 그런 소식을 들은 노사는 나라를 근심하고 걱정하느라 식음을 전폐하고 병환에 이를 지경이 되자, 견딜 수 없는 애국심에서 곧장 임금에게 상소를 올린다. 이름 하여 ‘병인소(丙寅疏)’라는 참신한 내용의 상소였다. 그해 7월의 일인데, 이른바 척사위정(斥邪衛正)의 논리를 설파한 국내 최초의 상소였다. 같은 때에 화서 이항로도 비슷한 내용의 척사위정의 상소를 올리는데 그때는 9월의 일이었으니 노사보다는 2개월 뒤의 일이었다. 

    그 당시 대부분의 논의가 외적과 싸우지 말고 화의(和議)를 이루자며 전쟁을 피하자던 주장이 대세를 이루던 때에, 노사는 결사반대하고 전쟁을 위한 군비강화책을 열거하고 나라 안에서는 정치를 제대로 하고, 나라 밖의 외적은 반드시 물리쳐야 한다는 척사론을 폈다. 노사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외적과 싸워 물리쳤고, 노사는 벼슬이 올라 공조참판이라는 고관이 내려지기도 했다. 바로 그 상소가 천하에 노사 기정진의 이름을 알린 상소였고, 최초로 척사위정의 이론을 온 국민에게 알린 글이었다. 


  • 4-장엄하고 아름다운 노사의 최후- 

    노사 기정진은 천재였다. 큰 선생 아래에서 글을 많이 배운 적도 없으나 4~5세에 이미 글을 해독하고 지을 줄을 알았으며, 7세에 지은 ‘하늘을 읊음(詠天)’이라는 시는 온 세상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시가 되었다. ‘사람들의 선악(善惡)에 따라 빠르게 보답한다네’(隨人善惡報施速)라는 글이 어떻게 7세 아동에게서 나올 수 있겠는가. 하늘은 인간의 선과 악에 따라 지체없이 상을 내리고 벌을 준다는 뜻이니, 7세에 이미 세상의 이치를 터득했다고 여기지 않을 수 없다. 그가 11세에 지었다는 ‘춘추정기(春秋亭記)’라는 글은 노성의 학자도 짓기 어려울 만큼의 높은 수준의 글이었다. 15세에 일어난 평안도의 홍경래난에 대하여 예언했던 이야기도 그만큼 사리판단에 밝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명분이 없는 민란은 승리하기 어렵기 때문에 오래가지 못하고 난이 평정된다고 노사가 말했다고 전해진다. 

    학자로서의 학문이 대체로 이룩된 20대 후반인 29세에는 최초로 서울 나들이를 떠났다. 당대의 학자이자 문장가인 대산 김매순(臺山 金邁淳)을 찾아 보았고 충청도로 내려오면서는 강재 송치규(剛齋 宋穉圭)를 찾았다. 당시에 가장 큰 학자로 이름이 높았던 이유다. 마침내 34세의 나이로 진사과에 장원한다. 연천 홍석주(淵泉 洪奭周) 같은 높은 수준의 학자가 시관(試官)이던 때문에 그래도 노사가 진사에 장원으로 합격을 했다고 전해진다. 아버지의 유언으로 진사과에 합격하자 그는 끝내 과거에 응시하는 일을 중단했으나, 노사에게는 그때부터 벼슬길이 열렸다. 35세 때부터 나라의 부름이 있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응하지 않았다. 45세에 내린 전설사(典設司) 별제(別提)에 겨우 6일 동안 근무했던 것이 그의 벼슬살이의 전부였다. 

    가난에서 벗어나도록 60세에 내린 고향 근처의 무장(茂長)현감이라는 벼슬도 완곡하게 거절하였고 산림(山林)의 벼슬인 장령(掌令)이나 집의(執義)는 물론 69세 때의 동부승지나 호조참의 등도 모두 거절하였고 재신(宰臣)의 지위인 공조참판이 내려졌고, 79세에는 호조참판에 임명되었어도 모두를 사양하고 학문연구에만 생애를 바치고 말았다. 

    노사의 생애에 말년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시골의 노학자로 과거에도 합격하지 못했지만 승지·참의·참판의 벼슬이 내려져도 전혀 응하지 않고, 77세에는 그의 대표적 논문인 ‘납량사의’를 수정하여 다시 쓰고, 81세에는 ‘외필’이라는 독특한 유리론의 이기철학을 완성하였다. 79세에 병자수호조약이 이룩되자 병이 나도록 우국충정을 이기지 못했으나 면암 최익현이 도끼를 들고 반대상소를 올렸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기쁜 표정을 지으며, “우리나라에 사람이 없다는 비웃음은 받지 않겠다”고 말하며 부끄러움을 이기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79세 때의 시조가 전해진다. “공명(功名)도 너 하여라 호걸도 나 싫으며, 문 닫으니 심산(深山)이요 책 펴니 사우(師友)로다. 오라는 곳 없건마는 흥 다하면 갈까 하노라”라는 시조 한 수는 그의 마지막 인생이 얼마나 아름다웠나를 반증해주고 있다. 학문의 높은 수준에, 아무런 미련 없이 아름답게 생을 마치겠다는 그의 뜻이 담겨 있다. 81세, 죽기 1년 전에야 생애의 대작인 대표적 논문을 저작한 그의 삶이 너무나 멋지지 않는가. 


  • 5-노사의 묘소와 척사위정탑- 

    노사의 학문과 사상을 이으며 학문이 강해지던 곳이 ‘고산서원’이라면, 노사의 가장 뚜렷한 유적지는 그의 묘소다. 당시의 행정구역은 영광군 지역이었으나, 지금의 행정구역은 장성군 동화면 남산리의 황산(凰山)마을이다. 몇 년 전에는 전국의 유림들이 성금을 바쳐 세운 ‘노사선생 신도비’가 우람하게 서 있다. 학자이자 의병대장으로 생전에 가장 노사를 숭앙했던 면암 최익현이 지은 글에 근래의 서예가 여초 김응현이 쓴 글씨다. 14세에 결혼하여 세상을 떠난 뒤 함께 합장으로 계시는 부인은 울산김씨로 하서 김인후 선생의 후손이다. 노사의 제자 중에 영남의 학자로 가장 큰 명성을 얻었던 노백헌 정재규가 지은 묘갈명이 새겨진 비가 우뚝 서 있다. “하늘이 우리의 도(道)를 도와 선생을 낳으셔, 정기(正氣)를 모아 진실로 대성(大成)하셨네”(天相斯道 正氣之會 展也大成)라는 찬사로 정재규는 선생의 높은 학문의 완성을 찬양하였다. 고산서원에는 노사의 학문이 살아서 강해진다면 묘소에는 노사의 혼이 잠겨 있다. 더구나 최근에는 이 나라에서 최초로 척사위정의 논리를 주창한 공로를 잊지 않기 위해, 묘소 곁에 척사위정탑이 장엄하게 세워져 후인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고 있으니, 역사의 땅이자 사상의 고향은 지나는 행인들의 마음을 되살아나게 해주고 있다. 


    박석무(한국고전번역원장)

장성의 인물 노사 기정진(장성군민신문. 2012)

  • 1장성은 예로부터 인물이 많이 나기로 유명한 고장이다. 광나장창(光羅長昌)이라 하여 광주, 나주, 창평과 더불어 인물이 많이 난다는 칭송을 들어왔다. 고종 때 흥선대원군은 '문장에 있어서 장성만한 곳은 없다(文不如長城)‘라고 했다. 또한 철종 임금은 '장안의 만개의 눈이 장성의 한 개의 눈 보다 못하다(長安萬目而 不如長城一目)’는 유명한 어록을 남기셨다. 이러한 말들은 장성의 훌륭한 인물과 문장을 두고 한 말이다. 여기에서는 흥선대원군과 철종 어록의 주인공인 노사 기정진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노사 기정진의 생애- 
    노사 기정진(1798 - 1879)은 화담 서경덕, 퇴계 이황, 율곡 이이, 한주 이진상, 녹문 임성주와 함께 조선시대 6대 철인 중 한 분이신 성리학의 대가이다. 기정진의 본관은 행주이며 호는 노사, 시호는 문간공으로 전북 순창군 복흥면에서 때어났다. 노사는 7세에 이미 성리철학의 깊은 이치를 깨우치고, 10세에 경서, 사서 등을 통독하였다. 18세 되던 1815년에 양친을 여의고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선대의 고향인 장성군 황룡면 하남으로 이사하게 되어 장성에서 여러 차례 집을 옮기며 살았다. 
    행주기씨 기정진 가문이 장성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기묘사화(1519년)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복재 기준은 한훤당 김굉필의 문인으로 정암 조광조와 같이 성리학적 도학정치에 뜻을 두다가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희생된다. 그의 형인 기진과 기원은 화를 피하여 광주와 장성에 각각 정착하게 된다. 바로 기대승은 기진의 아들이며, 기정진은 기원의 후손이다. 
    노사는 1831년 34세에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한 이후에 그 명성이 조정에 알려져 강릉참봉, 현릉참봉, 사옹원주부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1842년 45세에 전설사별제로 임명되자 취임 6일 만에 병을 핑계로 사임하고 귀향하였다. 얼마 뒤 다시 평안도도사, 무장현감, 사헌부장령, 사헌부집의에 임명되었으나 끝내 취임하지 않았다. 1862년 임술민란이 일어나자 <임술의책>을 써서 삼정의 폐단을 지적하고 이를 바로 잡을 대책을 제시하려 하였으나 올리지는 못했다. 상소할 것을 포기하고 상소문을 불살라 없애려 했으나 아들이 보관하여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이를 방어할 시무책인 여섯 가지 조목을 개진한 소위 <육조소> 라고 불리는 첫 번째 <병인소>를 조정에 올렸다. 이는 고종에게 받아들여지고 조정에서 식견이 높게 평가되어 그해 6월 사헌부집의, 7월에 동부승지, 8월에 호조참의, 10월에 가선대부의 품계와 함께 동지돈녕부사 등이 주어졌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이어 공조참판, 경연특진관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고, 80세 되던 1877년에는 우로전으로 가의대부(정2품)가 주어졌다. 그 해에 장성 진원 고산리에 이사하여 그곳에 담대헌이라는 정사를 짓고 많은 문인들과 함께 교유하다 82세의 나이로 생을 마치게 되었다. 

    -노사 기정진의 사상과 업적- 
    노사는 화서 이항로, 한주 이진상과 더불어 근세 유학을 대표하는 3대 유학자로 평가 받고 있다. 일정한 스승이 없이 깊은 사색과 명상으로 성리학의 이치를 스스로 터득해 자신의 사상체계를 세워 나갔다. 그의 5대조인 송암 기정익이 우암 송시열의 제자였기 때문에 노사는 일찍부터 기호학파의 적통인 율곡, 우암의 주기론(主氣論)을 계승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노사는 주기론이 지배적인 기호학계에 속하면서도 이러한 이론을 따르지 않고 주리론(主理論)에서도 유리론(唯理論)이라는 적극적인 주리론을 확립했다. 그는 지역적으로는 호남에 살았지만 영남 유리론과 상통하는 특이성을 보였으며 정치사상면에서는 위정척사의 입장에 있었다. 
    노사의 이기론의 특징은 리의 절대화이다. 그에게 있어 기는 리와 상대가 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라 리 안의 일이며 리가 움직일 때의 손과 발 일 뿐이라며 리의 존귀함을 강조했다. 

  • 2성리학에서 리를 강조하는 경향은 주로 이황 학파에서 보이지만 조선후기로 가면 이이 학파와 이황 학파 가리지 않고 광범위하게 나타났다. 대표적인 학파로 기정진 학파를 비롯하여 이항로 학파와 이진상 학파를 들 수 있다. 이처럼 리를 절대화하는 학설이 나오게 된 데에는 이들이 모두 관직을 포기하고 향촌에서 학문에만 전념했던 재지학자들로 기존의 학파나 학설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 처지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봉건적 질서의 해체와 서구제국주의의 침략이라는 대내외적 위기상황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이 글을 살펴보면 노사가 왜 그렇게 리를 절대화하려고 노력했는지 알 수 있다. 
    “천하의 큰 변고가 셋 있으니 부인이 남편의 자리를 빼앗은 것과 신하가 임금의 자리를 빼앗은 것, 그리고 오랑캐가 중화의 자리를 빼앗은 것이다. 만약 기가 리의 자리를 빼앗는다면 저 세 가지 변고는 다음의 일일 것이다.” 
    노사는 절대선의 세계로의 회복을 이루지 않고서는 어떤 힘으로도 그 시대를 바로 잡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가변적인 기보다는 불변적인 리에 절대적 가치와 권위를 부여하고 그것을 실체화하려고 했다. 그 절대선의 세계는 자신들이 기반하고 있는 봉건적인 성리학적 질서와 체계였다. 따라서 노사가 누구보다도 강력한 위정척사론자가 되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위정척사는 중국 송대 이후 여진족의 침공으로 중화문화가 위기에 봉착했을 때 중화적 정통문화인 유교를 수호하기 위하여 주자가 역설한 사상이다. 원래 위정척사라는 말은 바른 것을 지키고 옳지 못한 것은 배척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정사(正邪)의 의식은 역사적 상황과 여건에 따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고, 정통문화가 이질문화의 도전을 받았을 때 발생하는 의식이다. 
    조선왕조는 건국과 동시에 성리학을 국가지도이념 받아들여 정통사상으로 정립해 갔다. 그러나 조선후기 들어서 성리학이 점차 형식화, 관념화되면서 그 본질을 상실해 가다가 천주교라는 이질적인 서학이 들어오자 유교질서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러한 역사적인 상황 속에서 위정척사사상은 싹트기 시작했다. 천주교가 전통사회를 위협하는 사상으로 작용했기 때문에 정학인 유교를 지키기 위하여 사학(邪學)인 천주교를 배척할 필요성이 강조되었던 것이다. 주자학적 유교를 건국이념으로 하고 있는 조선왕조와 성리학자 입장에서 볼 때 천주교는 국가의 전통질서를 파괴하는 반국가적, 반사회적인 위험사상이었던 것이다. 위정척사사상은 주자학적 화이사상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보수성과 배타성, 사대주의적 모화사상이라는 한계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적 한계성은 한말의 역사적 위기상황 속에서 애국우국의식으로 나타나 민족주의사상으로 승화되었다. 
    한말에 있어서 위정척사사상을 애국우국의식의 민족주의사상으로 발전시킨 대표적인 사상가가 노사 기정진이다. 노사는 병인양요 때 올린 상소에서 서양의 경제적 침략성을 정확히 간파하고 이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국력을 배양해야 한다는 내수외양론(內修外壤論)을 역설하였다. 내용은 이렇다. 
    " 첫째 대외개방에 반대하는 입장에서 국론이 통일되어야 한다. 둘째 유사시에 대비하여 국내의 지세를 상세히 파악해야 한다. 셋째 외세의 침략에 대비하여 군적의 효율적인 관리와 국방력을 강화하여야 한다. 넷째 현명한 정책을 개진하게 하여 건설적인 정책을 대폭 수용하는데, 한글로 된 정책도 받아들여야 한다. 다섯째로 내정개혁을 착실히 수행하는 것만이 외세를 막는 지름길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일반 백성의 힘을 결집시킬수 있어야 한다.“ 
    또한 노사는 1862년 임술민란이 일어나자 이를 심각하게 인식하고 과감한 개혁책을 제시하였다. 그는 사대부의 부패상과 향리들의 부정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삼정 문란의 폐해를 일일이 지적하면서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토대로 제반 개혁을 추진할 것을 주장하였다. 즉 군포를 폐지하며 환곡은 면제하고 서원의 유생이 양민에게 끼치는 해독을 없애고 사치하는 풍토를 없애야 한다. 그리고 과거제도를 개혁하여 향거와 이선을 거친 다음 시험에 의하여 선발할 것을 주장하였다. 

  • 3이러한 내용은 당시 개혁책 중 전면적인 개혁론에 속하는 편으로 노사는 농민의 입장을 대변하여 양민 위주의 개혁을 요구했던 것이다. 
    노사의 저서로는 당시까지 지속되었던 호락논쟁을 비판하면서 이일분수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정리한 <납량사의 納凉私議>, 사단칠정 문제를 다룬 <우기 偶記>, 태극도설에 있는 정자에 대해 해설한 <정자설 定字說> 있다. 또한 이이의 이통기국설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담은 <이통설 理通說>, 77세에는 <납량사의>의 몇 구절을 수정하고 81세에는 그의 이기론의 핵심을 이루는 <외필 猥筆>을 저술하였다 
    노사는 조선사회의 해체와 서구제국주의의 침략이라는 위기 속에서 리의 절대화를 추구함으로써 나름대로 해결책을 제시하려 했다. 그가 주창한 위정척사사상은 보수성과 배타성, 사대주의적 모화사상이라는 한계점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한계점을 극복하고 애민애국의식의 민족주의 사상으로 승화시켜 기우만, 기삼연, 고광순, 정재규 등 한말 의병의 정신적인 토대가 되었다. 또한 1960년에 노사의 후학들에 의하여 간행된 ‘노사선생연원록’이라는 제자록에 의하면 친히 글을 배운 제자가 600여명에 이르고 그들 제자의 제자들까지 합하면 6000여명에 이르는 노사학파를 형성하였다. 
    그는 어릴 적 한 쪽 눈을 잃어 애꾸눈이었다. 한 쪽 눈으로 밖에 세상을 볼 수 없었지만‘장안만목이 불여장성일목’의 주인공이 되었다. 노사 기정진은 나라가 위기에 처한 어려운 시기에 나서 민족자존을 위해 몸부림치다 살다간 꼿꼿한 선비였다. 
    노사는 자신이 말년에 학문을 연구하기 위해 지었던 ‘담대헌’이 있는 고산서원에 위패가 모셔져 있다. 진원면에 위치한 고산서원은 기정진을 주향으로 이최선, 기우만 등 8위의 신위가 모셔져 있는 신실인 고산사가 있고, 강당으로 담대헌이 있다. 동재인 집의재와 서재인 거경재가 있으며 담대헌과 거경재 사이에는 노사문집의 목판본을 보관한 장판각이 있다.


    출처 : 장성군민신문(http://www.jsnews.co.kr)

일목문장 (一目文章) 노사 기정진(호남미래포럼.2015)

장성군 진원면에 있는 고산서원을 찾았다. 조선 성리학 6대가중 한 사람인 호남의 거유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1798∼1879)을 기리는 제향에 참석했다. 고산사 사당에는 기정진 선생을 주벽으로 하고 김석구·정재규 등 제자 8분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그런데 사당에는 노사 선생 신위만 있을 뿐 영정이 없다. 이순신, 이율곡, 정약용 등은 영정이 있는데, 근대인물이면서 왜 영정이 없을까?

그 사연은 이렇다. 노사 선생이 60세를 넘자 문인 오상봉이 초상화를 그리고자 청하자 노사는 얼굴이 추하니 사양하겠노라고 하였다. 그 뒤 김석구 등 제자들이 초상을 후세에 전하기를 청하였으나 노사는 극구 사양하며, “주검은 기 氣와 함께 소멸하는 데 무엇 때문에 다시 모습을 세상에 남길 것인가”하였다. 유리론자 唯理論者답게 이귀기천 理貴氣賤을 은근히 암시하고 있다. 

노사 선생은 키가 7척이고 상체가 하체보다 길었으며 귀는 크고 입은 모지며 눈썹은 길고 눈은 투명하였다. 그런데 그는 외눈박이였다. 6세 때 천연두를 앓아 왼쪽 눈을 실명하였다. 이러함에도 그는 “장안만목(長安萬目) 불여장성일목(不如長城 一目)”이란 말이 생기게 한 장본인이었다.


청나라 사신이 조선에 왔다. 그는 조선에 인물이 있는지를 알고자 천자의 명 命이라며 괴상한 문제를 냈다. “동해유어 무두무미무척(東海有魚 無頭無尾無脊), 용단호장 (龍短虎長) 화원서방(畵圓書方)? (동해에 고기(魚)가 있는데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고 척추뼈도 없다. 용은 짧고 호랑이는 길다. 그리면 둥글고 글씨로 쓰면 모가 난다. 이것이 무엇이냐?)


조정에서 문제를 못 풀어 노심초사 하고 있을 때 한 신하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장성에 신동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그 아이에게 물어 보면 어떠할 까요?”하였다. 급기야 관원을 장성에 급파하여 어린 기정진을 찾았다. 문제를 읽어보고서, 기정진은 “고기 어(魚)자에서 머리와 꼬리를 빼면 밭 전(田)자만 남고, 다시 척추 뼈에 해당하는 획 'ㅣ'를 다시 없애면 일(日)자만 남게 됩니다. ‘용은 짧고 호랑이는 길다’는 십간에 용은 진(辰)이요 호랑이는 인(寅)인데, 해가 동쪽 진방에서 뜰 때는 겨울이라 해가 짧고, 인방에서 뜰 때는 여름철이라 해가 길다는 뜻으로, 해의 일조 장단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리면 둥글고(⊙) 글씨로 쓰면 모가 나는 것(日)’은 바로 해(日)입니다” 라고 말하였다.


기정진의 이러한 문자 풀이에 임금과 조정 대신들이 모두 크게 감탄하면서, '장안만목불여장성일목(長安萬目不如長城一目)' 즉 '장안(서울)의 수많은 눈이 장성의 한 눈만 못하다'라는 말로 신동 기정진을 극구 칭찬했다고 한다.

 

그런데 버전이 또 하나 있다. 청나라 사신이 조선 조정에 시 한 구절을 보내 대구(對句)를 청하였다. '용단호장 오경루하석양홍(龍短虎長 五更樓下夕陽紅)' (‘용은 짧고 호랑이는 길다. 오경루 아래에 석양은 붉네.)

 
조선의 관리들이 머리를 맞대도 대구(對句)를 짓지 못했는데, 기정진은 “화원서방 구월산중춘초록(畵圓書方 九月山中春草綠)‘ (그리면 둥글고 글씨로 쓰면 모가 난다. 구월 산중에 봄풀이 푸르다)라고 대구하였다.

 
중국은 오경루에 지는 석양이지만, 조선은 구월산에 새로 돋아나는 봄풀로 표현한 것이다.


이후 노사 기정진은 ‘일목문장(一目文章)’으로 불렸고, '장안만목 불여장성일목(長安萬目 不如長城一目)이 나중에 ‘문불여장성 (文不如長城)’이 되었다.

 노사 기정진은 학문만 하지 않았다. 1862년에 삼정이 문란하고 삼남지방에 임술민란이 일어났을 때 ‘임술의책’을 지었고,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병인소’를 지어 올려 위정척사를 외쳤다. 그의 손자 기우만과 종손 기삼연도 한말 의병장이었다.

 이제 고산서원이 주말에 개방되었다. 호남의 거유 기정진을 만나러 한번 쯤 답사하시라.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무등일보 zmd@chol.com

노사 기정진, 애국충절의 가문은 왜 역사 속에서 희미한가?(한국인의 집)

https://hanok21c.blog.me/221478463294

위정척사 사상가ㆍ항일 의병장 가장 많이 배출한 집안

임란 극복 공로로 부자ㆍ형제가 공신록에 오르다.

부녀자들이 외출할 때에 머리를 덮는 쓰개를 너울이라고 하는데, 그 너울을 처음으로 만든 이가 기건(奇虔)이라는 사람이다. 기건은 세종ㆍ단종 때에 관리 생활을 했고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관직을 버리고 두문불출한 위인이다. 그의 후손들 가운데 뭔가 비범한 일을 한 사람이 많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기건의 고손으로 장성에 터를 잡은 기대유가 있고, 광주에 터를 잡은 기대승이 있다. 여기에서는 기대유 후손에 대해서만 알아보겠다.

기대유의 큰 아들이 기효간(奇孝諫, 1530~1593)이다. 그는 \'행주기씨 금강공파\'의 파조이다. 금강은 그의 호다. 하서 김인후 문하에 드나들며 공부했다. 가끔 당숙인 고봉 기대승에게도 나아가서 질문하며 강론했다. 김천일, 정철, 변이중 등과 교유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묘 곁 여막에서 3년 동안 생활했고, 크고 작은 제사에는 정성과 공경을 다하였다. 아버지 묘가 있는 산 이름을 제청산(祭廳山)이라고 부르게 된 것도 여기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기효간은 임진왜란 때 의병 활동을 하여 뒤에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책봉되었다. 그의 아들 기계헌(奇啓獻) 역시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을 받았다. 그리고 기효간의 동생 기효근(奇孝謹)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해남현령으로서 해전에 참가하였고, 정유재란 때에 적병을 만나 어머니와 함께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하여 역시 선무공신에 추록되었다. 부자와 형제가 전란 극복의 공신이 된 것이다.



기정진, 기양연은 위정척사를 주창하다.

유교 의례를 충실히 실천하며 조용하게 살던 기효간 후손들은 조선의 국운이 기울자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우선 노사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은 성리학 연구에서 일가를 이룬 당대 대학자였다. 그래서 전라도는 물론이고 경상도에 이르기까지 많은 제자를 두었다. 제자의 제자까지 합치면 엄청난 숫자라로 한다.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서양세력의 침략에 대한 대비책을 세워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다. 이 글이 이후 위정척사 사상의 기틀이 되었다.

기효간의 11세 종손 기양연(奇陽衍, 1827~1895)은 당숙인 기정진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문과 급제 후 여러 중앙관직을 역임했다. 국가의 기강이 해이해지고 일본의 침탈이 가시화되자 삼정책(三政策)의 상소를 올리고 고향에 은거하였고 위정척사 정신을 실현하는 데에 진력했다. 기윤진ㆍ양연 부자가 주고받은 편지가 종손가에 다량 남아 있는데, 그것을 최근에 탈초ㆍ번역한 책이 나온 바 있다(권수용, \'부자유친\').



기삼연, 기우만, 기산도는 항일의병 활동을 하다.

위 두 사람은 글을 통해 위정척사운동을 펼쳤지만, 다음의 세 사람은 총칼로 일제에 맞선 일을 했다. 먼저, 기삼연(奇參衍)은 의병을 일으켜 <호남창의맹소>'를 조직한 후 그 대장에 추대되었다. 고창 문수암에서 전과를 올렸고, 영광 법성포 순사 주재소를 기습하여 불태웠다. 순창에서 체포되어 광주천 백사장에서 총살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기우만(奇宇萬)은 기삼연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가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순천 조계산에서 다시 거사를 도모하던 중 고종이 강제 퇴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은둔하고 말았다. 기산도(奇山度)는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는 데에 앞장 선 매국노를 처단하는 활동을 했다. \'을사5적\' 가운데 한 사람인 이근택을 찔러 상해를 입혔다. 다 기정진의 사상적 영향을 받아서였고, 한말 남도를 피로 물들인 항일의병의 선봉이었다.

후손들 행적 가운데, 악행(惡行)은 보이지 않는다. 독서와 연구에 전념했고, 장서가로 소문난 가문이다. 그러면 좋은 일만 있어야 하는데 세상은 그렇지 않았다. 살림살이는 늘기는커녕 피폐만 거듭했다. 독립 운동가는 가난해지고 친일파는 부유해진다는 우리의 잘못된 근현대사를 눈앞에서 보고 있는 것 같다. 실정을 펴는 조정을 비판하고 주권을 침탈하는 일제를 후손들이 공격했다. 그것도 가장 앞장섰다. 그래서 조선말부터 일제 강점기 내내 종가의 세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부자 망해도 3대간다고 했듯이, 그래도 일제 강점기 초기 종가 땅은 최대 60마지기 정도는 되었다. 그런데 이마저도 보증과 재판 등으로 대부분 상실하고 말았다. 해방이 되었는데도 상황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계속 피해만 입고 있었다. 이 가슴 아픈 이야기로 이 글을 마무리 짓겠다.



6ㆍ25는 주택, 유물, 서책을 잿더미로

본래 종가는 황룡면 아곡리(아치실)에 있었다. 6ㆍ25 때에 아곡리 주택이 소실되고 말았다. 소실된 주택은 7칸짜리 안채, 사랑채, 행랑채, 솟을대문, 사당, 2채의 정자, 여러 채의 호집(하인 건물) 등이었다. 이 외에 아곡리 동구에 있던 별서(別墅)인 농소(農巢), 관동리 제실인 제청(祭廳)까지 모두 소실되었다. 6ㆍ25는 건물 외에 조상이 남긴 소중한 자료와 유물마저 잿더미로 만들고 말았다. 인민군 치하 때에 \'어떤 사람\'들이 종가의 자료와 유물을 마당에 내놓고 죽석(대로 엮은 발)으로 덮었다. 밤에 산 사람들이 내려와서 가지고 가고, 일부 고문서만 남았다. 비에 젖은 관복과 유물들은 현 종손의 선친인 기노만(奇老萬)께서 깨끗한 곳에서 소각했다고 한다.

이 애석함에 대해 종손 기준서(奇駿舒) 옹은 말한다. \"나까지 낳아 가지고 14대만에 떠나왔어요. 홍길동 생가마을 있는 곳에 있었어요. 원래 터가 있는데 산이랑 전부 문중에 내놨어요. 6·25 당시에 전부 불 질러 버렸죠. 14대까지 살았어요. 내가 상당히 커 갖고 나왔어요. 지금 내가 84인께. (어머님, 할아버님) 같이 사셨어요. 어렸을 때 일꾼들도 있고. 사당도 전부 타 부렀어요. 종가가 지금 있다면 7칸집 이었거든요. 사랑채에 반란군들이 들어온다고 군인들이 불 질러 부렀죠. 경찰들이 전부 불 질렀어요. 그래 가지고 나왔어요. 대지가 천 몇 평되어요. 483번지. 우리 금강할아버지 묘가 계신데.\" 아! 이 왠 몹쓸 짓인가ㆍ 우리 손으로 우리 것을 태워버렸으니.

폐허가 되어 버려 하는 수 없이 다른 곳으로 이사를 했다. 관동리의 제청산 선영 아래 제청 터에 살림집을 다시 짓고 이사를 했다. 그런데 또 왠 날 벼락인가ㆍ 그곳이 상무대 부지로 편입되고 말았다. 그래서 다시 짐을 싸서 현재의 위치 진원면으로 이사했다. 전통 와가로 지을 여력이 없어 현대식 주택을 신축했다. 생뚱맞은 종가이지만 하는 수 없었다.

금강 종가는 역사적으로 훌륭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하였으며, 4천여점에 달하는 많은 고문서를 현재까지 보존해고 있다. 필자는 이에 대한 문화재 지정 및 관리가 시급하다고 생각한다. 종가 또한 문화재 지정을 바라고 있다. 이제는 행정 당국이 나설 차례인 것 같다.

<전남일보> 광주교육대학교 교수 김덕진의 종가이야기

호남의병 재조명한 교육자료 발간…"교과서 다시 쓰여야"

[광주=뉴시스] 송창헌 기자 = 광주시교육청이 한말 호남의병장을 다룬 의미있는 교육용 역사자료를 발간했다.

28일 광주시교육청에 따르면 정책국 산하 교육정책연구소가 한말 호남의병장의 이야기를 담은 '나는 왜 이제야 아는가'를 발간해 광주지역 전체 초·중·고교와 특수학교, 공공도서관 등에 배부했다.

지난해 '의향 광주 위인 열전' 첫 발간사업에 이른 2탄이다. 근현대사의 어려운 시기마다 자신을 버리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한 몸 바쳤던 지역의 숨은 위인을 발굴해 의향(義鄕) 광주의 역사적 뿌리를 밝히고 그 숭고한 정신을 계승하자는 취지다.

지난해 발간한 '아름다운 사람들'에서는 1970~1980년대 한국의 민주주의를 이끌어온 시인 김남주,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 광주 항쟁 최후의 수배자 윤한봉, 극작가 박효선 등 4명의 인물을 담았다.

'나는 왜 이제야 아는가'에서는 1896~1909년 활동한 호남의병장들 가운데 호남 성리학의 기둥인 송사 기우만(노사 기정진의 손자)과 호남의병 운동의 실천적 주역인 성재 기삼연을 비롯, 안규홍, 심남일, 양진여, 전해산, 조경환, 김태원, 양회일, 고광순 등 10인의 삶을 탐구했다.

집필작업을 맡은 황광우 작가는 "광주를 의향, 민주화 성지라 부르지만 정작 '왜 의향인가'에 대해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는데 운사 여창현의 '운사유고'를 통해 한말 호남의병 운동의 주역들을 만나게 되면서 자신의 배움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이어 "고교 역사교과서에는 한말 의병운동의 거두로 최익현, 유인석, 평민 의병장 신돌석의 이름만이 등장하는데 한말 의병운동의 역사에 '전남'이 통째로 삭제된 교과서는 다시 쓰여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있었던 그대로의 역사' 만큼이나 '쓰인 역사'도 소중하고 우리는 고대그리스와 로마 영웅들에 대해선 찬양하고, 우리 선조들은 우습게 여기는 묘한 습성이 있다"며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처럼 역사적 사실에 충실하되, 의병장들의 삶과 고뇌를 공감할 수 있는 '의병문학'을 만들기 위해 힘썼고 왜 광주를 '의향'이라고 부르는지를 체감케 해 광주에 대한 자부심을 높이고 싶었다"고 말했다.
 
교육정책연구소 김준영 소장은 "한말 의병운동에서 호남 의병이 60%에 달하는 압도적 비중을 차지했음에도, 조명받지 못하고 있다"며 "한말 호남의병운동의 역사적 뿌리를 제대로 인식할 때 항일독립운동과 반독재 민주화운동에서 광주와 호남이 갖는 역할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현석룡 정책기획과장은 "지역의 숨은 위인을 발굴하는 작업이 필요하고, 학생들이 지역 역사를 올바르게 이해해 정의로운 민주 시민으로 자라날 수 있도록 정책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며 "독립유공자의 후손들이 떳떳하게 살 수 있도록 선양사업에 대한 우리 사회의 보다 깊은 관심과 실천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시민이 함께 만든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무등일보> ‘항일 독립운동 서예작품 시민 참여 전시회’가 지난 6월 13일부터 광주학생교육문화회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광주광역시가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일반 시민들이 소장한 항일독립운동 애국지사들의 휘호·서간·기록화 등 66점을 전시하고 있다.

위정척사사상을 정립한 노사 기정진 선생을 비롯하여 한말 호남 의병의 정신적 지주 기우만·‘호남창의회맹소’를 조직한 호남의병의 상징 기삼연·전해산, 그리고 민종식·안병찬·정운경·김도화·김복한·민용호·최병심·이설·양재해·신태식·박임상 등 전국 각지에서 의병을 일으켰던 순국지사의 삶이 소개되고 있다. 또한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황족이자 정부 고위 관료로 일신의 안위를 누릴 수 있음에도 자결을 통해 민족의 자존심에 불을 지핀 민영환, 고위 관리 출신으로 자결을 한 조병세·홍만식, 헤이그 특사 이준, 을사오적 권중현을 저격한 윤충하, 이토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의 절절한 한(恨)도 만나볼 수 있다.

국권을 빼앗기자 자결한 헤이그특사 이위종의 부친 이범진과 정재건·이만도·김석진 선생의 피맺힌 절규도 포함되어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내무총장 안창호·‘님의 침묵’으로 유명한 한용운 스님, 일본 천황을 암살하려는 박열을 도왔던 최범술 해인사 주지,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진 나석주 의사, 민족대표 33인 권동진·오세창을 비롯하여 3·1운동에 앞장 선 최한영·최봉환·김관묵, 비밀조직을 만든 박현채, 사회주의 운동의 선봉에 선 김철수, 쌍성보 전투에 빛나는 한국독립군 참모장 신숙 선생의 빛나는 삶의 모습도 볼 수 있다. 특히 을사5적 암살단 운영 자금을 후원한 민형식과 ‘유년필독’을 저술한 현채의 작품도 있다. 항일정신을 실천한 중국 지식인 유춘림의 서찰도 함께 볼 수 있어 이번 전시회의 역사적 가치를 더욱 빛내주고 있다.

이번 전시된 유묵들은, 순국지사들의 삶을 담담히 묘사한 서간, 깊은 내면의 세계를 드러내고 있는 휘호 등이 대부분이다. 병인양요 때 ‘척화주전(斥和主戰)’을 주장한 기정진의 격문 ‘거의격(擧義檄)’, 나석주 의사가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투탄하기 전날 묵었던 숙소가 서울 남대문밖 ‘동춘관’이라고 하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휘호 등은 사료적 가치 또한 매우 높다. 안중근 의사의 낙관이 있는 작품은 희귀한 것이다. 거사당일 ‘의열단심(義烈丹心)’이라는 휘호를 남기고 달려 나간 나석주 의사의 글은 차마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다.

이번 전시된 작품의 해설을 맡은 초당대 박해현 교수는 “이번에 소개된 서간이나 휘호들은, 의병전쟁, 순절, 의열 투쟁, 무장독립운동 등 우리 민족 독립 운동의 장엄한 투쟁을 압축한 한편의 서사시”라고 말하며 “사료적 가치가 뛰어난 작품이 많고 당시 애국지사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뜻 깊은 전시회”라고 의미를 설명한다. 이번 전시회는 오는 23일까지. 김혜진기자 hj@srb.co.kr

남도 의병의 물꼬를 튼 호남창의회맹소 대장

장하도다 기삼연

1910년 무렵 전라도 일대에서는 "장하도다 기삼연, 제비 같다 전해산, 잘 싸운다 김죽봉, 잘도 죽인다 안담살이, 되나 못되나 박포대" 라는 동요가 유행했다고 한다.

동요에 등장하는 인물은 어른은 물론 어린아이들까지도 우상으로 여긴 남도 의병장들이다. 이 중 맨 앞에 등장하는 기삼연은 1907년 장성 수연산에서 거병한 호남창의회맹소 대장으로, 한말 호남 의병의 큰 물꼬를 튼 대표적인 의병장이다. 김죽봉은 광주 농성광장에 동상이 세워진 김태원 의병장을, 안담살이는 평민 출신 의병장으로 교과서에 이름이 실린 보성 출신의 안규홍을, 박포대는 기삼연 의진의 부장인 박도경을 가리킨다.


 
기삼연의 호남창의회맹소는 기삼연 사후 부장이었던 김태원, 전해산, 이석용, 심남일, 박도경 등이 남도 의병을 이끄는 독립의병 부대로 분화, 발전한다. 그리고 이들 의병부대의 활동 때문에, 일제는 1909년 9월 1일부터 10월 25일까지 소위 '남한 폭도 대토벌 작전'이라 이름 붙은 '전라도 의병 대토벌 작전'을 전개했고, 전라도는 한말 최대 의병 항쟁지가 된다. 광주·전남이 '의로움의 고장'이라 불리게 된 밑바탕에는 이처럼 기삼연의 호남창의회맹소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기삼연은 1851년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 하남마을에서 진사 기봉진의 4남으로 태어난다. 호는 성재(省齋)다. 일찍이 위정척사운동의 거두인 노사 기정진에게 글을 배웠는데, 문장 뿐 아니라 병서에도 재주가 뛰어나 기정진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고 한다. 기삼연은 기정진의 5촌이 되는 종질(從姪)이었고, 기정진의 손자인 기우만의 삼종숙(三從叔)이기도 했다.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기우만은 1896년 2월 7일(음력) 장성향교에서 거병했다. '장성의병'이 그것이다. 장성은 노사학파의 본고장으로, 노사의 손자이며 제자인 기우만의 영향력이 컸다. 이때 기삼연은 백마를 타고 300여 의병을 모집했기 때문에 '백마장군'이라는 별칭을 얻는다.


 
나주로 행군한 장성의병은 같은 해 2월 2일, 이학상을 의병장으로 거병한 나주의병과 함께 호남 각 읍치를 점거하고 북상하려는 개혁을 세운다. 그러나 전 학부대신 신기선이 사령관 이겸제와 관병 500명을 이끌고 와 임금의 해산명령을 전하자, 나주의병에 이어 장성의병마저 해산하고 만다. 이에 기삼연은 "유생과는 함께 일을 할 수 없구나. 장수가 밖에 있을 적에는 임금의 명령도 받지 아니하는 수가 있거늘, 하물며 강한 적의 협박을 받은 것으로 우리 임금의 본심이 아님에랴. 이 군사가 한 번 파하면 우리 무리는 모두 왜놈이 될 뿐이다."라고 개탄한다.

1905년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을사늑약을 강요한 후 외교권을 빼앗자, 기삼연은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대낮에도 산짐승이 나타나는 인적이 드문 수연산 기슭 송계마을로 이사한다.

호남창의 회맹소 대장이 되다

수연산에 은거한 기삼연은 날마다 상민 출신의 선머슴들과 술을 마시며 놀았다. 큰 뜻을 품은 선비가 저잣거리에서 술이나 마시며 폐인처럼 행세했던 것은 일제의 감시를 따돌리는 위장술이었다. 그는 가슴 속에 '인통함원(忍痛含寃)', 즉 원한을 품고 고통을 참으며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연산 자락으로 이사 후 그는 총을 사 모으고 화약과 실탄을 만들었다. 식량과 의복도 구했다. 종손인 기형도는 총을 보탰고, 형 양연은 무쇠 덩어리를 구해주었으며, 전 군수 이용중은 군자금 900냥을 내놓기도 했다.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 이후 고종황제가 퇴위하고 군대마저 해산되자, 기삼연은 장성 수연산 석수암(石水庵)에서 '호남창의회맹소'라는 의병부대를 결성하여 거병한다. 대장에 기삼연, 통령에 김용구, 선봉에 김준(김태원)이, 동요에 등장하는 박도경은 포대(砲隊)에, 전해산은 종사(從事)에 임명된다.<전남일보>

호남창의회맹소를 결성한 후 격문을 지어 사방에 돌려 백성들의 협력을 촉구하며, 적에게 부역하는 자는 처단하고, 그 재산은 몰수할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그리고 격문 끝에 평민이 일인 한 사람을 죽이면 상금 100냥을 주고, 순검 일진회원이 일인 한 사람을 죽이면 죄를 면해 주고, 두 사람을 죽이면 상금 100냥을 준다고 첨가하여 포고하였다.

호남창의회맹소의 활동은 1907년 9월, 고창 문수사 전투부터 시작된다. 1907년 12월에는 법성포를 공격, 순사주재소와 일본인 가옥을 불태운다. 세곡을 탈취한 후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었고, 나머지는 군량미로 사용한다. 호남창의회맹소의 활동은 1908년 1월에도 계속된다. 담양, 장성, 함평 등 여러 읍과 광주의 일본인 농장을 습격했다. 헌병분견소, 세무서, 관청, 일진회원, 일본인 상점, 우편 취급소 등이 주 공격 대상이었다.

재판 없이 광주천에서 총살되다

'호남창의회맹소'의 기세가 날로 높아지자, 일본군 광주수비대는 '폭도토벌대'를 편성하여 의병부대를 추격한다. 일군 토벌대에 쫓긴 기삼연은 1월 30일(양력) 300여 의병을 이끌고 담양 금성산성에 들어온다. 험준한 지세를 이용하여 휴식을 취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큰 비로 노숙하는 의병들의 옷이 젖어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있을 때, 담양 주둔 일군의 기습을 받는다. 의병 30여 명이 전사하는 큰 피해를 입자, 기삼연 부대는 짙은 안개를 이용하여 북문을 통해 탈출한다. 순창의 복흥산으로 옮긴 기삼연은 설날을 맞아 의진을 일시 해산하고, 정월 보름에 다시 집결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기삼연의 계획은 설날 일군에 체포되면서 물거품이 된다.
 
복흥산에서 의병을 해산한 기삼연은 구수동(九水洞)에 사는 6촌 동생 기구연의 집에 숨어들어 아침 설상을 받는다. 이때 일군 수십 명이 들이닥쳐 기삼연을 찾으며 집주인을 해치려 하였다. 기우만이 저술한 '호남의사열전'에는 당시의 모습이 다음처럼 서술되어 있다. "정월 초하룻날 아침 음식을 먹으려는데, 적 수십명이 들이닥쳐 수색하였다. 기대장을 내놓으라면서 집주인에게 총칼을 들이댔다. 돌연 성재는 창에서 큰소리를 질렀다. 기대장은 여기 있다. 주인이 무슨 죄냐?"

담양에서 광주로 압송되어 가는데 길에서 보는 이들이나 가마를 메고 가는 이들이 모두 눈물을 흘려 잘 가지 못했다고 한다. 1908년 2월 2일(양력) 설날이었다.

호남창의회맹소 선봉장 김태원이 담양 무동촌에서 일본 수비대장 요시다(吉田)를 죽이고 그 잔졸들을 추격하다 기삼연 대장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김태원 부대원들이 대장을 구하기 위해 경양역까지 쫓아오지만, 기삼연은 이미 광주헌병대에 수감 된 뒤였다. 일군은 의병들이 기삼연을 구하기 위해 광주헌병대를 습격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이튿날인 2월 3일 광주천 서천교 밑 백사장에서 재판 없이 처형하고 만다.

광주 헌병대에 수감 당시 기삼연은 죽음을 직감하고 다음의 절명시를 남긴다. "군사를 내어 이기지 못하고 먼저 죽으니(出師未捷先死)/ 일찍이 해를 삼킨 꿈은 또한 헛것인가(呑日曾年夢亦虛)" 기삼연이 일찍이 삼키려 했던 '해'는 '일본'이었다. 그러나 그는 끝내 그 꿈을 이루지 못한 채 광주천에서 쓰러진다. 그가 처형당한 광주천 서천교 밑 백사장은 10년 뒤 '조선독립 만세' 소리로 가득 찬 광주 3·1운동의 발발지가 된다.

기삼연의 시신은 한동안 광주천 백사장에 방치되었다. 며칠 뒤 광주의 선비 안규용이 관을 갖추고 염한 후 서탑등(지금의 사직공원)에 매장하고 '호남의병장 기삼연'이라 쓴 목비를 세운다.

기삼연 의병장을 품은 현장을 찾다

호남창의회맹소 대장 기삼연(1851~1908) 의병장은 어디에 묻혀 있을까? 지역사를 들여다본 지 이십 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 그의 무덤을 찾은 적은 없다. 다행히 후손 되는 기호철 교수로부터 황룡면 아곡리 산 44번지에 위치한다는 소식 듣고, 현장을 찾았다.

그의 무덤은 그가 태어난 아곡리 하남마을에 들어선 홍길동 테마파크에서 황룡강 쪽인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500여 미터 쯤 가다 보면, 오른쪽 산자락에 있다. 무덤 앞은 상석이 놓여 있었고 돌로 무덤 주위를 둘렀다. 무덤 오른쪽에는 1974년 장성의 유학자 변시연이 글을 짓고 이병현이 글을 쓴 '호남창의영수성재기삼연선생지묘(湖南倡義領袖省齋奇參衍先生之墓)'라 새긴 묘비가 서 있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기삼연 의병장의 시신이 이곳에 묻힌 것은 아니었다. 1908년 2월 3일 재판 절차도 없이 광주천 백사장에서 일군에 의해 총살된 후 묻혔던 곳은 서탑등, 지금의 사직공원이었다. 20여 년 후 조상들이 모셔진 장성 황룡면 관동리 21번지(보룡산)로 이장하지만, 산짐승들이 자주 출몰하여 무덤을 훼손하곤 했다. 2009년 다시 옮긴 곳이 고향 마을 뒷산인 지금의 장소다. 통한의 순국, 그리고 두 번의 이장, 이제는 고향 하남마을을 내려다보면서 마음 편히 잠들었으면 싶다.

장성공원에 오르면 장성읍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이곳에 기삼연 의병장을 기린 제법 큰 규모의 순국비가 서 있다. 기단부와 오석(烏石)의 비신, 전통 한옥 문양의 머릿돌을 갖춘 당당한 비다. 비신에는 '湖南倡義領袖奇參衍先生殉國碑(호남창의영수기삼연선생순국비)'라 새겼다. 의병장이 아닌 '선생'이란 표현이 다소 생경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성재 기삼연은 의병장 이전에 한학자였고, 유림이었다. 무덤 옆 묘비명에도 '선생'이라 쓰고 있었다.

기삼연이 일군의 총에 맞고 순국한 곳은 광주천 서천교 밑 백사장이다. 이곳 백사장은 기삼연 의병장이 순국 10년 후인 1919년 다시 독립 만세 소리로 진동한다. 광주 3·1운동이 거의지였기 때문이다. 지금 광주천 부동교 옆에는 기삼연의병장의 순국지임을 알리는 표석이 광주 3·1운동 표석과 함께 서 있는 이유다. 10년 단위로 일어난 두 사건은 광주·전남이 항일·독립의 역사에 어떤 역할을 수행 한 곳인지를 잘 보여준다.

장성 수연산 석수암도 꼭 기억해야 한다. 기삼연은 1896년 봉기 실패 후 이곳 수연산에 은거하며 때를 기다린다. 그리고 1907년 9월(양력), 석수암에서 기삼연을 대장으로 한 '호남창의회맹소'가 결성된다. 석수암은 실질적인 최초의 남도 의병 결성지였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 수연산 석수암은 찾아보는 것조차 쉽지 않다. 대한민국 장교를 양성하는 상무대의 관할구역으로 군 당국의 허락이 필요한 군사지역이기 때문이다. 필자도 현장을 찾았지만, 출입금지란 푯말 앞에 현장을 확인할 수 없었다.

지금 수연산에 석수암이란 암자는 없다. 의병 토벌 당시 일제에 의해 불살라졌고, 이후 복원되었다가 6·25동란 때 다시 불타버렸기 때문이다. 터만 남아 있는 이유다.

 
역사는 꼭 보존하고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오늘 광주·전남인의 정체성이 된 호남창의회맹소의 결성지인 석수암도 그 중 하나다. 표석을 세우고 석수암을 복원하자. 이는 남도를 '정의로움'으로 고장으로 자부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의 의무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