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군 진원면에 있는 고산서원을 찾았다. 조선 성리학 6대가중 한 사람인 호남의 거유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1798∼1879)을 기리는 제향에 참석했다. 고산사 사당에는 기정진 선생을 주벽으로 하고 김석구·정재규 등 제자 8분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그런데 사당에는 노사 선생 신위만 있을 뿐 영정이 없다. 이순신, 이율곡, 정약용 등은 영정이 있는데, 근대인물이면서 왜 영정이 없을까?
그 사연은 이렇다. 노사 선생이 60세를 넘자 문인 오상봉이 초상화를 그리고자 청하자 노사는 얼굴이 추하니 사양하겠노라고 하였다. 그 뒤 김석구 등 제자들이 초상을 후세에 전하기를 청하였으나 노사는 극구 사양하며, “주검은 기 氣와 함께 소멸하는 데 무엇 때문에 다시 모습을 세상에 남길 것인가”하였다. 유리론자 唯理論者답게 이귀기천 理貴氣賤을 은근히 암시하고 있다.
노사 선생은 키가 7척이고 상체가 하체보다 길었으며 귀는 크고 입은 모지며 눈썹은 길고 눈은 투명하였다. 그런데 그는 외눈박이였다. 6세 때 천연두를 앓아 왼쪽 눈을 실명하였다. 이러함에도 그는 “장안만목(長安萬目) 불여장성일목(不如長城 一目)”이란 말이 생기게 한 장본인이었다.
청나라 사신이 조선에 왔다. 그는 조선에 인물이 있는지를 알고자 천자의 명 命이라며 괴상한 문제를 냈다. “동해유어 무두무미무척(東海有魚 無頭無尾無脊), 용단호장 (龍短虎長) 화원서방(畵圓書方)? (동해에 고기(魚)가 있는데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고 척추뼈도 없다. 용은 짧고 호랑이는 길다. 그리면 둥글고 글씨로 쓰면 모가 난다. 이것이 무엇이냐?)
조정에서 문제를 못 풀어 노심초사 하고 있을 때 한 신하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장성에 신동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그 아이에게 물어 보면 어떠할 까요?”하였다. 급기야 관원을 장성에 급파하여 어린 기정진을 찾았다. 문제를 읽어보고서, 기정진은 “고기 어(魚)자에서 머리와 꼬리를 빼면 밭 전(田)자만 남고, 다시 척추 뼈에 해당하는 획 'ㅣ'를 다시 없애면 일(日)자만 남게 됩니다. ‘용은 짧고 호랑이는 길다’는 십간에 용은 진(辰)이요 호랑이는 인(寅)인데, 해가 동쪽 진방에서 뜰 때는 겨울이라 해가 짧고, 인방에서 뜰 때는 여름철이라 해가 길다는 뜻으로, 해의 일조 장단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리면 둥글고(⊙) 글씨로 쓰면 모가 나는 것(日)’은 바로 해(日)입니다” 라고 말하였다.
기정진의 이러한 문자 풀이에 임금과 조정 대신들이 모두 크게 감탄하면서, '장안만목불여장성일목(長安萬目不如長城一目)' 즉 '장안(서울)의 수많은 눈이 장성의 한 눈만 못하다'라는 말로 신동 기정진을 극구 칭찬했다고 한다.
그런데 버전이 또 하나 있다. 청나라 사신이 조선 조정에 시 한 구절을 보내 대구(對句)를 청하였다. '용단호장 오경루하석양홍(龍短虎長 五更樓下夕陽紅)' (‘용은 짧고 호랑이는 길다. 오경루 아래에 석양은 붉네.)
조선의 관리들이 머리를 맞대도 대구(對句)를 짓지 못했는데, 기정진은 “화원서방 구월산중춘초록(畵圓書方 九月山中春草綠)‘ (그리면 둥글고 글씨로 쓰면 모가 난다. 구월 산중에 봄풀이 푸르다)라고 대구하였다.
중국은 오경루에 지는 석양이지만, 조선은 구월산에 새로 돋아나는 봄풀로 표현한 것이다.
이후 노사 기정진은 ‘일목문장(一目文章)’으로 불렸고, '장안만목 불여장성일목(長安萬目 不如長城一目)이 나중에 ‘문불여장성 (文不如長城)’이 되었다.
노사 기정진은 학문만 하지 않았다. 1862년에 삼정이 문란하고 삼남지방에 임술민란이 일어났을 때 ‘임술의책’을 지었고,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병인소’를 지어 올려 위정척사를 외쳤다. 그의 손자 기우만과 종손 기삼연도 한말 의병장이었다.
이제 고산서원이 주말에 개방되었다. 호남의 거유 기정진을 만나러 한번 쯤 답사하시라.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무등일보 zmd@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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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란 극복 공로로 부자ㆍ형제가 공신록에 오르다.
부녀자들이 외출할 때에 머리를 덮는 쓰개를 너울이라고 하는데, 그 너울을 처음으로 만든 이가 기건(奇虔)이라는 사람이다. 기건은 세종ㆍ단종 때에 관리 생활을 했고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관직을 버리고 두문불출한 위인이다. 그의 후손들 가운데 뭔가 비범한 일을 한 사람이 많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기건의 고손으로 장성에 터를 잡은 기대유가 있고, 광주에 터를 잡은 기대승이 있다. 여기에서는 기대유 후손에 대해서만 알아보겠다.
기대유의 큰 아들이 기효간(奇孝諫, 1530~1593)이다. 그는 \'행주기씨 금강공파\'의 파조이다. 금강은 그의 호다. 하서 김인후 문하에 드나들며 공부했다. 가끔 당숙인 고봉 기대승에게도 나아가서 질문하며 강론했다. 김천일, 정철, 변이중 등과 교유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묘 곁 여막에서 3년 동안 생활했고, 크고 작은 제사에는 정성과 공경을 다하였다. 아버지 묘가 있는 산 이름을 제청산(祭廳山)이라고 부르게 된 것도 여기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기효간은 임진왜란 때 의병 활동을 하여 뒤에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책봉되었다. 그의 아들 기계헌(奇啓獻) 역시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을 받았다. 그리고 기효간의 동생 기효근(奇孝謹)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해남현령으로서 해전에 참가하였고, 정유재란 때에 적병을 만나 어머니와 함께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하여 역시 선무공신에 추록되었다. 부자와 형제가 전란 극복의 공신이 된 것이다.
기정진, 기양연은 위정척사를 주창하다.
유교 의례를 충실히 실천하며 조용하게 살던 기효간 후손들은 조선의 국운이 기울자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우선 노사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은 성리학 연구에서 일가를 이룬 당대 대학자였다. 그래서 전라도는 물론이고 경상도에 이르기까지 많은 제자를 두었다. 제자의 제자까지 합치면 엄청난 숫자라로 한다.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서양세력의 침략에 대한 대비책을 세워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다. 이 글이 이후 위정척사 사상의 기틀이 되었다.
기효간의 11세 종손 기양연(奇陽衍, 1827~1895)은 당숙인 기정진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문과 급제 후 여러 중앙관직을 역임했다. 국가의 기강이 해이해지고 일본의 침탈이 가시화되자 삼정책(三政策)의 상소를 올리고 고향에 은거하였고 위정척사 정신을 실현하는 데에 진력했다. 기윤진ㆍ양연 부자가 주고받은 편지가 종손가에 다량 남아 있는데, 그것을 최근에 탈초ㆍ번역한 책이 나온 바 있다(권수용, \'부자유친\').
기삼연, 기우만, 기산도는 항일의병 활동을 하다.
위 두 사람은 글을 통해 위정척사운동을 펼쳤지만, 다음의 세 사람은 총칼로 일제에 맞선 일을 했다. 먼저, 기삼연(奇參衍)은 의병을 일으켜 <호남창의맹소>'를 조직한 후 그 대장에 추대되었다. 고창 문수암에서 전과를 올렸고, 영광 법성포 순사 주재소를 기습하여 불태웠다. 순창에서 체포되어 광주천 백사장에서 총살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기우만(奇宇萬)은 기삼연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가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순천 조계산에서 다시 거사를 도모하던 중 고종이 강제 퇴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은둔하고 말았다. 기산도(奇山度)는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는 데에 앞장 선 매국노를 처단하는 활동을 했다. \'을사5적\' 가운데 한 사람인 이근택을 찔러 상해를 입혔다. 다 기정진의 사상적 영향을 받아서였고, 한말 남도를 피로 물들인 항일의병의 선봉이었다.
후손들 행적 가운데, 악행(惡行)은 보이지 않는다. 독서와 연구에 전념했고, 장서가로 소문난 가문이다. 그러면 좋은 일만 있어야 하는데 세상은 그렇지 않았다. 살림살이는 늘기는커녕 피폐만 거듭했다. 독립 운동가는 가난해지고 친일파는 부유해진다는 우리의 잘못된 근현대사를 눈앞에서 보고 있는 것 같다. 실정을 펴는 조정을 비판하고 주권을 침탈하는 일제를 후손들이 공격했다. 그것도 가장 앞장섰다. 그래서 조선말부터 일제 강점기 내내 종가의 세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부자 망해도 3대간다고 했듯이, 그래도 일제 강점기 초기 종가 땅은 최대 60마지기 정도는 되었다. 그런데 이마저도 보증과 재판 등으로 대부분 상실하고 말았다. 해방이 되었는데도 상황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계속 피해만 입고 있었다. 이 가슴 아픈 이야기로 이 글을 마무리 짓겠다.
6ㆍ25는 주택, 유물, 서책을 잿더미로
본래 종가는 황룡면 아곡리(아치실)에 있었다. 6ㆍ25 때에 아곡리 주택이 소실되고 말았다. 소실된 주택은 7칸짜리 안채, 사랑채, 행랑채, 솟을대문, 사당, 2채의 정자, 여러 채의 호집(하인 건물) 등이었다. 이 외에 아곡리 동구에 있던 별서(別墅)인 농소(農巢), 관동리 제실인 제청(祭廳)까지 모두 소실되었다. 6ㆍ25는 건물 외에 조상이 남긴 소중한 자료와 유물마저 잿더미로 만들고 말았다. 인민군 치하 때에 \'어떤 사람\'들이 종가의 자료와 유물을 마당에 내놓고 죽석(대로 엮은 발)으로 덮었다. 밤에 산 사람들이 내려와서 가지고 가고, 일부 고문서만 남았다. 비에 젖은 관복과 유물들은 현 종손의 선친인 기노만(奇老萬)께서 깨끗한 곳에서 소각했다고 한다.
이 애석함에 대해 종손 기준서(奇駿舒) 옹은 말한다. \"나까지 낳아 가지고 14대만에 떠나왔어요. 홍길동 생가마을 있는 곳에 있었어요. 원래 터가 있는데 산이랑 전부 문중에 내놨어요. 6·25 당시에 전부 불 질러 버렸죠. 14대까지 살았어요. 내가 상당히 커 갖고 나왔어요. 지금 내가 84인께. (어머님, 할아버님) 같이 사셨어요. 어렸을 때 일꾼들도 있고. 사당도 전부 타 부렀어요. 종가가 지금 있다면 7칸집 이었거든요. 사랑채에 반란군들이 들어온다고 군인들이 불 질러 부렀죠. 경찰들이 전부 불 질렀어요. 그래 가지고 나왔어요. 대지가 천 몇 평되어요. 483번지. 우리 금강할아버지 묘가 계신데.\" 아! 이 왠 몹쓸 짓인가ㆍ 우리 손으로 우리 것을 태워버렸으니.
폐허가 되어 버려 하는 수 없이 다른 곳으로 이사를 했다. 관동리의 제청산 선영 아래 제청 터에 살림집을 다시 짓고 이사를 했다. 그런데 또 왠 날 벼락인가ㆍ 그곳이 상무대 부지로 편입되고 말았다. 그래서 다시 짐을 싸서 현재의 위치 진원면으로 이사했다. 전통 와가로 지을 여력이 없어 현대식 주택을 신축했다. 생뚱맞은 종가이지만 하는 수 없었다.
금강 종가는 역사적으로 훌륭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하였으며, 4천여점에 달하는 많은 고문서를 현재까지 보존해고 있다. 필자는 이에 대한 문화재 지정 및 관리가 시급하다고 생각한다. 종가 또한 문화재 지정을 바라고 있다. 이제는 행정 당국이 나설 차례인 것 같다.
<전남일보> 광주교육대학교 교수 김덕진의 종가이야기
[광주=뉴시스] 송창헌 기자 = 광주시교육청이 한말 호남의병장을 다룬 의미있는 교육용 역사자료를 발간했다.
28일 광주시교육청에 따르면 정책국 산하 교육정책연구소가 한말 호남의병장의 이야기를 담은 '나는 왜 이제야 아는가'를 발간해 광주지역 전체 초·중·고교와 특수학교, 공공도서관 등에 배부했다.
지난해 '의향 광주 위인 열전' 첫 발간사업에 이른 2탄이다. 근현대사의 어려운 시기마다 자신을 버리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한 몸 바쳤던 지역의 숨은 위인을 발굴해 의향(義鄕) 광주의 역사적 뿌리를 밝히고 그 숭고한 정신을 계승하자는 취지다.
지난해 발간한 '아름다운 사람들'에서는 1970~1980년대 한국의 민주주의를 이끌어온 시인 김남주,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 광주 항쟁 최후의 수배자 윤한봉, 극작가 박효선 등 4명의 인물을 담았다.
'나는 왜 이제야 아는가'에서는 1896~1909년 활동한 호남의병장들 가운데 호남 성리학의 기둥인 송사 기우만(노사 기정진의 손자)과 호남의병 운동의 실천적 주역인 성재 기삼연을 비롯, 안규홍, 심남일, 양진여, 전해산, 조경환, 김태원, 양회일, 고광순 등 10인의 삶을 탐구했다.
집필작업을 맡은 황광우 작가는 "광주를 의향, 민주화 성지라 부르지만 정작 '왜 의향인가'에 대해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는데 운사 여창현의 '운사유고'를 통해 한말 호남의병 운동의 주역들을 만나게 되면서 자신의 배움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이어 "고교 역사교과서에는 한말 의병운동의 거두로 최익현, 유인석, 평민 의병장 신돌석의 이름만이 등장하는데 한말 의병운동의 역사에 '전남'이 통째로 삭제된 교과서는 다시 쓰여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있었던 그대로의 역사' 만큼이나 '쓰인 역사'도 소중하고 우리는 고대그리스와 로마 영웅들에 대해선 찬양하고, 우리 선조들은 우습게 여기는 묘한 습성이 있다"며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처럼 역사적 사실에 충실하되, 의병장들의 삶과 고뇌를 공감할 수 있는 '의병문학'을 만들기 위해 힘썼고 왜 광주를 '의향'이라고 부르는지를 체감케 해 광주에 대한 자부심을 높이고 싶었다"고 말했다.
교육정책연구소 김준영 소장은 "한말 의병운동에서 호남 의병이 60%에 달하는 압도적 비중을 차지했음에도, 조명받지 못하고 있다"며 "한말 호남의병운동의 역사적 뿌리를 제대로 인식할 때 항일독립운동과 반독재 민주화운동에서 광주와 호남이 갖는 역할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현석룡 정책기획과장은 "지역의 숨은 위인을 발굴하는 작업이 필요하고, 학생들이 지역 역사를 올바르게 이해해 정의로운 민주 시민으로 자라날 수 있도록 정책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며 "독립유공자의 후손들이 떳떳하게 살 수 있도록 선양사업에 대한 우리 사회의 보다 깊은 관심과 실천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무등일보> ‘항일 독립운동 서예작품 시민 참여 전시회’가 지난 6월 13일부터 광주학생교육문화회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광주광역시가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일반 시민들이 소장한 항일독립운동 애국지사들의 휘호·서간·기록화 등 66점을 전시하고 있다.
위정척사사상을 정립한 노사 기정진 선생을 비롯하여 한말 호남 의병의 정신적 지주 기우만·‘호남창의회맹소’를 조직한 호남의병의 상징 기삼연·전해산, 그리고 민종식·안병찬·정운경·김도화·김복한·민용호·최병심·이설·양재해·신태식·박임상 등 전국 각지에서 의병을 일으켰던 순국지사의 삶이 소개되고 있다. 또한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황족이자 정부 고위 관료로 일신의 안위를 누릴 수 있음에도 자결을 통해 민족의 자존심에 불을 지핀 민영환, 고위 관리 출신으로 자결을 한 조병세·홍만식, 헤이그 특사 이준, 을사오적 권중현을 저격한 윤충하, 이토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의 절절한 한(恨)도 만나볼 수 있다.
국권을 빼앗기자 자결한 헤이그특사 이위종의 부친 이범진과 정재건·이만도·김석진 선생의 피맺힌 절규도 포함되어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내무총장 안창호·‘님의 침묵’으로 유명한 한용운 스님, 일본 천황을 암살하려는 박열을 도왔던 최범술 해인사 주지,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진 나석주 의사, 민족대표 33인 권동진·오세창을 비롯하여 3·1운동에 앞장 선 최한영·최봉환·김관묵, 비밀조직을 만든 박현채, 사회주의 운동의 선봉에 선 김철수, 쌍성보 전투에 빛나는 한국독립군 참모장 신숙 선생의 빛나는 삶의 모습도 볼 수 있다. 특히 을사5적 암살단 운영 자금을 후원한 민형식과 ‘유년필독’을 저술한 현채의 작품도 있다. 항일정신을 실천한 중국 지식인 유춘림의 서찰도 함께 볼 수 있어 이번 전시회의 역사적 가치를 더욱 빛내주고 있다.
이번 전시된 유묵들은, 순국지사들의 삶을 담담히 묘사한 서간, 깊은 내면의 세계를 드러내고 있는 휘호 등이 대부분이다. 병인양요 때 ‘척화주전(斥和主戰)’을 주장한 기정진의 격문 ‘거의격(擧義檄)’, 나석주 의사가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투탄하기 전날 묵었던 숙소가 서울 남대문밖 ‘동춘관’이라고 하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휘호 등은 사료적 가치 또한 매우 높다. 안중근 의사의 낙관이 있는 작품은 희귀한 것이다. 거사당일 ‘의열단심(義烈丹心)’이라는 휘호를 남기고 달려 나간 나석주 의사의 글은 차마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다.
이번 전시된 작품의 해설을 맡은 초당대 박해현 교수는 “이번에 소개된 서간이나 휘호들은, 의병전쟁, 순절, 의열 투쟁, 무장독립운동 등 우리 민족 독립 운동의 장엄한 투쟁을 압축한 한편의 서사시”라고 말하며 “사료적 가치가 뛰어난 작품이 많고 당시 애국지사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뜻 깊은 전시회”라고 의미를 설명한다. 이번 전시회는 오는 23일까지. 김혜진기자 hj@srb.co.kr
장하도다 기삼연
1910년 무렵 전라도 일대에서는 "장하도다 기삼연, 제비 같다 전해산, 잘 싸운다 김죽봉, 잘도 죽인다 안담살이, 되나 못되나 박포대" 라는 동요가 유행했다고 한다.
동요에 등장하는 인물은 어른은 물론 어린아이들까지도 우상으로 여긴 남도 의병장들이다. 이 중 맨 앞에 등장하는 기삼연은 1907년 장성 수연산에서 거병한 호남창의회맹소 대장으로, 한말 호남 의병의 큰 물꼬를 튼 대표적인 의병장이다. 김죽봉은 광주 농성광장에 동상이 세워진 김태원 의병장을, 안담살이는 평민 출신 의병장으로 교과서에 이름이 실린 보성 출신의 안규홍을, 박포대는 기삼연 의진의 부장인 박도경을 가리킨다.
기삼연의 호남창의회맹소는 기삼연 사후 부장이었던 김태원, 전해산, 이석용, 심남일, 박도경 등이 남도 의병을 이끄는 독립의병 부대로 분화, 발전한다. 그리고 이들 의병부대의 활동 때문에, 일제는 1909년 9월 1일부터 10월 25일까지 소위 '남한 폭도 대토벌 작전'이라 이름 붙은 '전라도 의병 대토벌 작전'을 전개했고, 전라도는 한말 최대 의병 항쟁지가 된다. 광주·전남이 '의로움의 고장'이라 불리게 된 밑바탕에는 이처럼 기삼연의 호남창의회맹소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기삼연은 1851년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 하남마을에서 진사 기봉진의 4남으로 태어난다. 호는 성재(省齋)다. 일찍이 위정척사운동의 거두인 노사 기정진에게 글을 배웠는데, 문장 뿐 아니라 병서에도 재주가 뛰어나 기정진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고 한다. 기삼연은 기정진의 5촌이 되는 종질(從姪)이었고, 기정진의 손자인 기우만의 삼종숙(三從叔)이기도 했다.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기우만은 1896년 2월 7일(음력) 장성향교에서 거병했다. '장성의병'이 그것이다. 장성은 노사학파의 본고장으로, 노사의 손자이며 제자인 기우만의 영향력이 컸다. 이때 기삼연은 백마를 타고 300여 의병을 모집했기 때문에 '백마장군'이라는 별칭을 얻는다.
나주로 행군한 장성의병은 같은 해 2월 2일, 이학상을 의병장으로 거병한 나주의병과 함께 호남 각 읍치를 점거하고 북상하려는 개혁을 세운다. 그러나 전 학부대신 신기선이 사령관 이겸제와 관병 500명을 이끌고 와 임금의 해산명령을 전하자, 나주의병에 이어 장성의병마저 해산하고 만다. 이에 기삼연은 "유생과는 함께 일을 할 수 없구나. 장수가 밖에 있을 적에는 임금의 명령도 받지 아니하는 수가 있거늘, 하물며 강한 적의 협박을 받은 것으로 우리 임금의 본심이 아님에랴. 이 군사가 한 번 파하면 우리 무리는 모두 왜놈이 될 뿐이다."라고 개탄한다.
1905년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을사늑약을 강요한 후 외교권을 빼앗자, 기삼연은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대낮에도 산짐승이 나타나는 인적이 드문 수연산 기슭 송계마을로 이사한다.
호남창의 회맹소 대장이 되다
수연산에 은거한 기삼연은 날마다 상민 출신의 선머슴들과 술을 마시며 놀았다. 큰 뜻을 품은 선비가 저잣거리에서 술이나 마시며 폐인처럼 행세했던 것은 일제의 감시를 따돌리는 위장술이었다. 그는 가슴 속에 '인통함원(忍痛含寃)', 즉 원한을 품고 고통을 참으며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연산 자락으로 이사 후 그는 총을 사 모으고 화약과 실탄을 만들었다. 식량과 의복도 구했다. 종손인 기형도는 총을 보탰고, 형 양연은 무쇠 덩어리를 구해주었으며, 전 군수 이용중은 군자금 900냥을 내놓기도 했다.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 이후 고종황제가 퇴위하고 군대마저 해산되자, 기삼연은 장성 수연산 석수암(石水庵)에서 '호남창의회맹소'라는 의병부대를 결성하여 거병한다. 대장에 기삼연, 통령에 김용구, 선봉에 김준(김태원)이, 동요에 등장하는 박도경은 포대(砲隊)에, 전해산은 종사(從事)에 임명된다.<전남일보>
호남창의회맹소를 결성한 후 격문을 지어 사방에 돌려 백성들의 협력을 촉구하며, 적에게 부역하는 자는 처단하고, 그 재산은 몰수할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그리고 격문 끝에 평민이 일인 한 사람을 죽이면 상금 100냥을 주고, 순검 일진회원이 일인 한 사람을 죽이면 죄를 면해 주고, 두 사람을 죽이면 상금 100냥을 준다고 첨가하여 포고하였다.
호남창의회맹소의 활동은 1907년 9월, 고창 문수사 전투부터 시작된다. 1907년 12월에는 법성포를 공격, 순사주재소와 일본인 가옥을 불태운다. 세곡을 탈취한 후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었고, 나머지는 군량미로 사용한다. 호남창의회맹소의 활동은 1908년 1월에도 계속된다. 담양, 장성, 함평 등 여러 읍과 광주의 일본인 농장을 습격했다. 헌병분견소, 세무서, 관청, 일진회원, 일본인 상점, 우편 취급소 등이 주 공격 대상이었다.
재판 없이 광주천에서 총살되다
'호남창의회맹소'의 기세가 날로 높아지자, 일본군 광주수비대는 '폭도토벌대'를 편성하여 의병부대를 추격한다. 일군 토벌대에 쫓긴 기삼연은 1월 30일(양력) 300여 의병을 이끌고 담양 금성산성에 들어온다. 험준한 지세를 이용하여 휴식을 취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큰 비로 노숙하는 의병들의 옷이 젖어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있을 때, 담양 주둔 일군의 기습을 받는다. 의병 30여 명이 전사하는 큰 피해를 입자, 기삼연 부대는 짙은 안개를 이용하여 북문을 통해 탈출한다. 순창의 복흥산으로 옮긴 기삼연은 설날을 맞아 의진을 일시 해산하고, 정월 보름에 다시 집결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기삼연의 계획은 설날 일군에 체포되면서 물거품이 된다.
복흥산에서 의병을 해산한 기삼연은 구수동(九水洞)에 사는 6촌 동생 기구연의 집에 숨어들어 아침 설상을 받는다. 이때 일군 수십 명이 들이닥쳐 기삼연을 찾으며 집주인을 해치려 하였다. 기우만이 저술한 '호남의사열전'에는 당시의 모습이 다음처럼 서술되어 있다. "정월 초하룻날 아침 음식을 먹으려는데, 적 수십명이 들이닥쳐 수색하였다. 기대장을 내놓으라면서 집주인에게 총칼을 들이댔다. 돌연 성재는 창에서 큰소리를 질렀다. 기대장은 여기 있다. 주인이 무슨 죄냐?"
담양에서 광주로 압송되어 가는데 길에서 보는 이들이나 가마를 메고 가는 이들이 모두 눈물을 흘려 잘 가지 못했다고 한다. 1908년 2월 2일(양력) 설날이었다.
호남창의회맹소 선봉장 김태원이 담양 무동촌에서 일본 수비대장 요시다(吉田)를 죽이고 그 잔졸들을 추격하다 기삼연 대장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김태원 부대원들이 대장을 구하기 위해 경양역까지 쫓아오지만, 기삼연은 이미 광주헌병대에 수감 된 뒤였다. 일군은 의병들이 기삼연을 구하기 위해 광주헌병대를 습격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이튿날인 2월 3일 광주천 서천교 밑 백사장에서 재판 없이 처형하고 만다.
광주 헌병대에 수감 당시 기삼연은 죽음을 직감하고 다음의 절명시를 남긴다. "군사를 내어 이기지 못하고 먼저 죽으니(出師未捷先死)/ 일찍이 해를 삼킨 꿈은 또한 헛것인가(呑日曾年夢亦虛)" 기삼연이 일찍이 삼키려 했던 '해'는 '일본'이었다. 그러나 그는 끝내 그 꿈을 이루지 못한 채 광주천에서 쓰러진다. 그가 처형당한 광주천 서천교 밑 백사장은 10년 뒤 '조선독립 만세' 소리로 가득 찬 광주 3·1운동의 발발지가 된다.
기삼연의 시신은 한동안 광주천 백사장에 방치되었다. 며칠 뒤 광주의 선비 안규용이 관을 갖추고 염한 후 서탑등(지금의 사직공원)에 매장하고 '호남의병장 기삼연'이라 쓴 목비를 세운다.
기삼연 의병장을 품은 현장을 찾다
호남창의회맹소 대장 기삼연(1851~1908) 의병장은 어디에 묻혀 있을까? 지역사를 들여다본 지 이십 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 그의 무덤을 찾은 적은 없다. 다행히 후손 되는 기호철 교수로부터 황룡면 아곡리 산 44번지에 위치한다는 소식 듣고, 현장을 찾았다.
그의 무덤은 그가 태어난 아곡리 하남마을에 들어선 홍길동 테마파크에서 황룡강 쪽인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500여 미터 쯤 가다 보면, 오른쪽 산자락에 있다. 무덤 앞은 상석이 놓여 있었고 돌로 무덤 주위를 둘렀다. 무덤 오른쪽에는 1974년 장성의 유학자 변시연이 글을 짓고 이병현이 글을 쓴 '호남창의영수성재기삼연선생지묘(湖南倡義領袖省齋奇參衍先生之墓)'라 새긴 묘비가 서 있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기삼연 의병장의 시신이 이곳에 묻힌 것은 아니었다. 1908년 2월 3일 재판 절차도 없이 광주천 백사장에서 일군에 의해 총살된 후 묻혔던 곳은 서탑등, 지금의 사직공원이었다. 20여 년 후 조상들이 모셔진 장성 황룡면 관동리 21번지(보룡산)로 이장하지만, 산짐승들이 자주 출몰하여 무덤을 훼손하곤 했다. 2009년 다시 옮긴 곳이 고향 마을 뒷산인 지금의 장소다. 통한의 순국, 그리고 두 번의 이장, 이제는 고향 하남마을을 내려다보면서 마음 편히 잠들었으면 싶다.
장성공원에 오르면 장성읍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이곳에 기삼연 의병장을 기린 제법 큰 규모의 순국비가 서 있다. 기단부와 오석(烏石)의 비신, 전통 한옥 문양의 머릿돌을 갖춘 당당한 비다. 비신에는 '湖南倡義領袖奇參衍先生殉國碑(호남창의영수기삼연선생순국비)'라 새겼다. 의병장이 아닌 '선생'이란 표현이 다소 생경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성재 기삼연은 의병장 이전에 한학자였고, 유림이었다. 무덤 옆 묘비명에도 '선생'이라 쓰고 있었다.
기삼연이 일군의 총에 맞고 순국한 곳은 광주천 서천교 밑 백사장이다. 이곳 백사장은 기삼연 의병장이 순국 10년 후인 1919년 다시 독립 만세 소리로 진동한다. 광주 3·1운동이 거의지였기 때문이다. 지금 광주천 부동교 옆에는 기삼연의병장의 순국지임을 알리는 표석이 광주 3·1운동 표석과 함께 서 있는 이유다. 10년 단위로 일어난 두 사건은 광주·전남이 항일·독립의 역사에 어떤 역할을 수행 한 곳인지를 잘 보여준다.
장성 수연산 석수암도 꼭 기억해야 한다. 기삼연은 1896년 봉기 실패 후 이곳 수연산에 은거하며 때를 기다린다. 그리고 1907년 9월(양력), 석수암에서 기삼연을 대장으로 한 '호남창의회맹소'가 결성된다. 석수암은 실질적인 최초의 남도 의병 결성지였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 수연산 석수암은 찾아보는 것조차 쉽지 않다. 대한민국 장교를 양성하는 상무대의 관할구역으로 군 당국의 허락이 필요한 군사지역이기 때문이다. 필자도 현장을 찾았지만, 출입금지란 푯말 앞에 현장을 확인할 수 없었다.
지금 수연산에 석수암이란 암자는 없다. 의병 토벌 당시 일제에 의해 불살라졌고, 이후 복원되었다가 6·25동란 때 다시 불타버렸기 때문이다. 터만 남아 있는 이유다.
역사는 꼭 보존하고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오늘 광주·전남인의 정체성이 된 호남창의회맹소의 결성지인 석수암도 그 중 하나다. 표석을 세우고 석수암을 복원하자. 이는 남도를 '정의로움'으로 고장으로 자부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의 의무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