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 기정진에 대하여

기정진 [奇正鎭] - 19세기 호남 유학의 마지막 거장 (인물한국사)

  • 11798 ~ 1879.

    한국사를 비롯한 동양사에서 근대는 희망의 시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서양과 본격적으로 접촉하면서 그들의 압도적인 무력과 기술력에 속절없이 무너진 혼란과 격동의 시간이었다. 유례없는 대규모의 침략 앞에서 동양 각국의 지식인과 민중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대응책을 모색했다. ‘동도서기(東道西器. 조선)’나 ‘중체서용(中體西用. 중국)’, ‘화혼양재(和魂洋才. 일본)’처럼 공통된 의미의 표어에는 당시 동아시아 지식인들의 고민이 압축되어 있다.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은 조선을 대표하는 마지막 유학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81세의 긴 생애 동안 거의 벼슬하지 않고 학문에만 몰두해 조선 유학의 중요한 주제인 주리론(主理論)을 심화시켰다. 그러나 그의 학문은 이념에만 머물지 않고 현실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해 근대의 격동에 대응한 주요한 흐름인 ‘위정척사(衛正斥邪) 운동’을 태동시켰다. 그는 이념과 현실 모두에서 큰 발자취를 남긴 조선 성리학의 마지막 거장으로 평가된다.


  • 2명민한 어린 시절
    기정진은 본관이 경기도 행주(幸州)로 자는 대중(大中 또는 大仲), 호는 노사(蘆沙)ㆍ오산노인(鰲山老人),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아버지는 기재우(奇在祐, 1769~1815), 어머니는 안동 권씨로 처사(處士, 벼슬하지 않은 선비) 권덕언(權德彦)의 딸이다.
    그의 가문은 기호학파의 대표적 인물인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을 배출한 호남의 명문인 행주 기씨였지만, 그의 직계는 그리 현달하지 못했다. 기정진의 10대조는 기묘명현 기준(奇遵)의 둘째 형 기원(奇遠)이고, 8대조 기효간(奇孝諫, 1530~1593)은 중종 때의 유명한 학자로 문묘에 종사된 김인후(金麟厚)에게 배웠으며, 5대조 기정익(奇挺翼, 1627~1690)은 송시열에게 수학했다. 증조 기종상(奇宗相)은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조부 기태량(奇泰良)은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아버지 기재우는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그러나 이런 조상들은 관직의 높이나 학문적 명성은 일반적 기준에 비추어 출중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기정진은 정조 22년(1798) 6월 3일 전라북도 순창군(淳昌郡) 조동(槽洞)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금빛 얼굴을 가진 큰 사람이 남자아이를 안고 오는 꿈을 꾼 뒤 12개월 만에 그를 낳았다고 한다.
    기정진은 어려서부터 뛰어난 지력을 보여주었다. 그는 네 살 때(1802, 순조 2) [효경(孝經)]과 [격몽요결(擊蒙要訣)] 등을 읽었고, 이때부터 5~6년 동안 [소학]ㆍ[대학연의(大學衍義)]를 비롯한 경서와 [강목]ㆍ[춘추] 등의 역사서를 두루 공부했다. 그는 기억력이 매우 좋아 보는 것은 모두 외웠다고 한다. 판단력과 행실도 올발라 네 살 때는 이웃집 과일이 자기 집 마당에 떨어지자 모두 주워 되돌려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다섯 살 때 천연두를 앓아 왼쪽 시력을 잃는 불행을 겪기도 했다.
    그의 명민함은 일찍부터 널리 알려졌던 것 같다. 12세 때(1810, 순조 10) 백암사(白巖寺)에서 독서했는데, 그의 이름을 듣고 각지에서 배우려고 몰려왔다. 그는 “조용히 독서하려는 계획이 틀어졌다”면서 돌아갔다. 이듬해에는 하서 김인후의 후손인 진사 김의휴(金宜休. 본관 울산)의 딸과 혼인했다. 앞서 본 조상의 학맥이 작용한 결과였다.
    17세(1815, 순조 15) 때는 부모님이 거의 동시에 돌아가는 슬픔을 겪었다. 5월 15일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이틀 만에 어머니도 세상을 떠난 것이다. 공교롭게도 그의 부모는 같은 해(1769년)에 태어났다가 46년 만에 거의 같은 시점에 별세했다. 양친을 여읜 뒤 기정진은 선대의 고향인 전남 장성으로 이주했고, 거기서 삼년상을 치렀다(1817, 순조 17 탈상). 그 2년 뒤에는 아들 기만연(奇晩衍)이 태어났다(1819. 21세).

  • 3본격적인 학문 연마
    외형적으로 기정진의 삶은 매우 단순했다. 그는 소과를 장원으로 통과했지만 대과는 응시하지 않았고, 높은 명성 때문에 여러 벼슬에 제수되었지만 아주 잠깐을 빼고는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평생을 공부하고 글을 썼다. 그의 학문은 성리학이 중심이었지만, 국가의 위기가 심화된 노년에는 현실적 문제에 관련된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그 글들은 ‘위정척사’ 운동의 주요한 사상적 토대가 되었다.
    기정진은 20대 중반부터 5~6년 동안 영취산(靈鷲山) 문수사(文殊寺)ㆍ관불암(觀佛庵) 등에서 독서하고 두류산(頭流山) 등을 유람했다. 그러다가 33세(1831, 순조 31) 봄 사마시(司馬試. 문과 소과)에 응시해 장원을 차지했다. 그 뒤 좌의정까지 역임한 연천(淵泉) 홍석주(洪奭周, 1774~1842)는 그 시험을 관장하면서 “이 사람의 글은 성리학에서 나왔는데, 중간의 몇 구절은 이전 사람이 말하지 않은 것이다. 이런 인재를 뽑았으니 나는 부끄러울 것이 없다”고 말했다.
    기정진은 이듬해 강릉참봉(康陵參奉. 종9품)에 제수되었지만 이조에서 자신의 조상 이름을 잘못 기재하자 벼슬을 버리고 그대로 귀향했다. 그 뒤에도 현릉(顯陵)참봉(1835, 헌종 1)ㆍ사옹원(司饔院) 주부(主簿. 종6품. 1837)에 제수되었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그의 관직 생활을 아주 짧아서 45세(1842, 헌종 8) 때 전설사(典設司) 별제(別提. 정ㆍ종6품)에 임명되어 엿새 동안 근무한 것이 전부였다. 그 뒤에도 기정진은 사헌부 장령(1861)ㆍ집의(1864)ㆍ사헌부 집의ㆍ동부승지ㆍ호조참의(1866)ㆍ호조참판(1876) 등 여러 관직에 제수되었지만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앞서 말했듯이 그는 오로지 학문에 매진했다.


  • 4주요 저작의 산출
    기정진의 주요 저작은 40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산출되어 노년까지 꾸준히 이어졌다. 기정진의 학문은 이(理)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이일원론(理一元論) 관점의 주리론이라고 요약된다. 그는 특정한 사승(師承) 관계나 학맥에 의존하지 않고 성리학의 근원인 중국 송대의 학문을 직접 연구해 독자적인 견해를 제시했다고 평가된다.
    그의 주요한 저작은 40대 중반에 저술한 <납량사의(納凉私議)>(1843, 헌종 9. 46세. 1874년 수정. 77세)를 비롯해 50대 중반에 지은 <이통설(理通說)>(1853, 철종 4. 55세)과 81세의 노령에 발표한 <외필(猥筆)>(고종 15년, 1878) 등이 꼽힌다.
    먼저 ‘더위를 피해 서늘한 기운을 느끼며 사사롭게 의논하다’는 의미의 <납량사의>는 그 제목대로 여름에 피서를 가서 쓴 논문으로, 저자의 사상이 가장 잘 드러나 있다고 평가되는 글이다. 그의 학문은 ‘이일분수(理一分殊)’라는 표현으로 집약되는데, 말 그대로 “이(理)는 하나지만 수많은 형태로 나뉜다”는 뜻이다. 그는 이의 철저한 주재를 확신하면서 “이는 비교할 수 없이 존귀하며(理尊無對) 본체와 쓰임 모두를 구성한다(理體理用)”고 주장했다. 즉 그는 기를 중시하는 주기론과 기의 존재를 일정하게 인정하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부정하고 이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주리론을 주장한 것이다. <납량사의>는 그런 그의 주리론이 가장 잘 집약된 논문으로 평가되는데, 매천(梅泉) 황현(黃玹)은 이 글이 당시 여러 학자들의 이론을 모두 쓸어버릴 정도라고 격찬했다.
    10년 뒤 노년에 접어든 시점에서 집필한 <이통설>에서는 주리론을 좀더 심화시켰다. 거기서도 기정진은 이(理)의 절대성과 영원성을 전제하면서 인간과 사물의 모든 현상은 아무런 막힘이 없는 이의 오묘한 운동에 따라 이뤄지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별세하기 1년 전에 작성한 <외필>은 ‘외람되게 쓴 글’이라는 제목대로 가장 큰 논란을 불러온 글이었다. 이황과 함께 조선 성리학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인 이이(李珥)의 주기론을 비판했다고 지적할 수 있는 내용 때문이었다. 일찍이 이이는 “음양의 운동은 기(氣)의 영향에 따른 것이지 그렇게 하도록 만든 것이 있지는 않다”고 주장했는데, 기정진은 운동하는 것은 기(氣)지만 그렇게 만드는 것은 이(理)라고 규정함으로써 기의 자발성을 부정하고 이의 근본적인 주재성을 다시 한번 강조한 것이다.
    이런 기정진의 학설은 이이와 배치된다는 민감성 때문에 그의 생전에는 다른 학자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제자 중에서도 그의 핵심적인 저술을 확인한 사람은 몇 명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실제로 그의 글들은 상당한 반발을 불러왔다. 그가 별세한 뒤 <외필>ㆍ<납량사의> 등의 내용이 알려지면서 최동민(崔東敏)ㆍ권봉희(權鳳熙) 등 영남 노론 계열의 학자들은 그 두 글을 문집에서 삭제할 것을 요구했으며, 기정진과 함께 호남 유학을 대표한 학자인 간재(艮齋) 전우(田愚, 1841∼1922)는 <외필변(猥筆辨)>ㆍ<납량사의 기의(記疑)> (이상 1902) 등을 지어 기정진의 이론을 비판했다.
    그밖에 [태극도설(太極圖說)]에 나오는 ‘정(定)’자에 대한 해설인 <정자설(定字說)>과 사단칠정(四端七情)을 논의한 [우기(偶記)], 제자들과의 문답을 기록한 [답문유편(答問類編)] 등도 주요 저술로 평가된다.

  • 5시대적 문제를 고민하다
    19세기 중반을 넘어가면서 조선은 점차 근대의 격랑 속으로 빠져들었다. 식민지로 전락한 결과가 보여주듯이, 그때 조선은 총체적 난국이었다고 말할 만했다. 모든 노력은 거의 무용했다. 서양의 첫 침입인 병인양요(1866, 고종 3)가 일어났을 때 기정진은 68세였다.
    그해 7월 조선을 대표하는 지식인으로서 그는 현실 문제를 논의한 상소를 올렸다. <병인소(丙寅疏)>라고 불리는 그 상소에서 그는 외세에 대비하는 여섯 조항을 건의했다. ① 미리 조정의 계획을 확정할 것(先定朝算), ② 먼저 외교적 언사를 다듬을 것(先修辭令), ③ 지형을 살필 것(審地形), ④ 군사를 조련할 것(鍊兵), ⑤ 의견을 널리 구할 것(求言), ⑥ 시급히 내부를 정비해 외침을 물리치는 근본으로 삼을 것(汲汲內修以爲外攘之本) 등이었다. ‘육조소(六條疏)’라고도 불리는 이 상소의 내용은 당시의 쇄국정책과 상통하는 것으로 그 뒤 전개된 위정척사(衛正斥邪) 사상의 이론적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조선의 국운은 속절없이 무너져갔다. 10년 뒤 최초의 불평등조약인 ‘병자수호조약’이 일본의 강압으로 체결된 것이다(1876, 고종 13). 그 소식을 들은 78세의 기정진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는 자신을 한탄하며 붓과 벼루를 내가라고 말했다. 그러나 최익현(崔益鉉, 1833~1907)이 도끼를 지고 궐문에 나아가 상소를 올려 조약 체결에 반대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동방에 사람이 없다는 비웃음은 피할 수 있겠다”고 기뻐하기도 했다.
    위정척사 운동의 이론과 실천을 대표하는 두 거목의 인연은 지속되었다. 이 상소 때문에 흑산도로 유배 간 최익현은 3년 뒤인 고종 16년(1879)에 풀려나자 장성의 담대헌(澹對軒. 지금의 고산〔高山〕서원)으로 기정진을 예방했고, 1901년에는 기정진의 신도비문을 짓기도 했다.


  • 6별세와 평가
    기정진이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쓴 장성고산서원(長城高山書院). 이 서원은 기정진이 조선 고종 15년(1878)에 ‘담대헌’이라고 이름 짓고 학문을 가르치던 곳이다. 1924년에 후손들이 다시 지었으며, 1927년 ‘고산서원’ 이라고 쓴 현판을 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라남도 기념물 제63호로, 전남 장성군 진원면에 위치해 있다.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기정진은 최익현이 예방한 그해 12월 29일에 담대헌에서 세상을 떠났고, 이듬해 2월 전라남도 영광(靈光)의 봉산(鳳山)에 안장되었다. 그뒤 [노사집]이 간행되었고(1883, 고종 20) ‘문간(文簡)’이라는 시호를 받았다(1910, 순종 4).
    앞서 말했듯이 기정진의 학문과 인격은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다. 당대를 대표하는 문장가로 예조참판을 역임한 김매순(金邁淳, 1776~1840) 등은 그를 본질과 응용이 구비된 인물로 칭송했으며([노사집] <연보>), 구한말의 유명한 유학자인 이건창(李建昌)은 보성에 유배되었을 때 [노사집]을 읽고 “천하에 참다운 학문”이라고 격찬했다(황현, [매천야록]). 기정진은 서경덕(徐敬德)ㆍ이황(李滉)ㆍ이이(李珥)ㆍ임성주(任聖周)ㆍ이진상(李震相)과 함께 조선 성리학의 6대가로 꼽히기도 했다(현상윤, [조선유학사]). 그의 제자로는 이최선(李最善)ㆍ조성가(趙性家)ㆍ정재규(鄭載圭) 등이 있으며 이항로(李恒老)의 화서(華西)학파, 전우의 간재학파 등과 함께 조선 후기 성리학의 큰 줄기를 형성했다.
    그때의 격랑이 밀려오던 19세기 후반에 평생 성리학을 연구하고 위정척사의 사상적 토대를 마련한 그의 삶은 지금 보면 답답하거나 고루하다고 비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시대적 조건과 한계 속에서 살아간다. 예컨대 이백(李白)과 두보(杜甫)는 안사(安史)의 난으로 대표되는 당말의 혼란기에 명시들을 지었고, 베토벤은 나폴레옹 전쟁이 유럽을 휩쓸던 격동기에 <영웅 교향곡>을 작곡했다. 모두 현실과는 멀리 유리된 행동이다. 그러나 어쩌면 이런 우회적인 접근만이 예술가나 학자가 세상에 개입하는 정직한 방식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어떤 이의 한계를 인정할 때 그의 장점과 실체를 정확하고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http://www.hjkee.com/bbs/board.php?bo_table=a02&wr_id=331> 

글 김범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조선시대 정치사와 사회사를 전공하고 있다. 저서에 [사화와 반정의 시대](2007), [연산군-그 인간과 시대의 내면](2010), 번역서에 [유교적 경세론과 조선의 제도들-유형원과 조선후기](제임스 B. 팔레 지음, 2008)가 있다.

노사 기정진의 출생 설화 蘆沙奇正鎭-出生說話 (향토문화대사전)

  • 1「노사 기정진의 출생 설화」는 순창이 배출한 대유학자인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1798~1879]이 한쪽 눈을 잃게 된 일화이다. 기정진의 부친 기재우(奇在祐)가 일찍 세상을 떠난 부모에게 효를 행하기 위하여 풍수지리학상 길지(吉地)를 찾아 부모를 모셨는데, 이곳이 순창 복흥의 ‘황앵탁목혈(黃鶯啄木穴)’이라는 명당이었다. ‘황앵탁목혈’이라는 묘지 풍수는 그 명당에 묫자리를 쓰면 3대손이 복을 받게 된다는 혈자리인데, 특히 3대 후손 중에서 한쪽 눈이 없는 아이가 태어나야 명당 발복이 제대로 된다는 것이다. 이후 기정진을 얻었고, 태어나서 7일이 지난 후 하녀의 잘못으로 한쪽 눈을 잃게 되었는데, ‘황앵탁목혈’이어서 노사 선생이 한쪽 눈을 잃는다는 풍수와 일치하여 대유학자가 될 수 있었다는 인물담이자 명당 발복담이다.

  • 2노사 기정진 선생은 조선의 6대 성리학자 중의 한 사람이다. 노사 선생은 1798년(정조 22) 6월 3일 유시(酉時)에 순창군 복흥방 조동[현재, 동산리]에서 아버지 기재우와 어머니 안동 권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원래 기재우는 전남 장성의 하남에서 태어났으나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큰아버지인 태온(太溫)에게 의지하여 살았다. 기재우는 부모도 없이 불행한 유년을 보냈으나 현실에 굴하지 않고 틈틈이 글을 읽었다. 『소학(小學)』을 읽으면서 부모에게 효행을 할 수 없음을 안타깝게 여기다가, 자신이 효를 행할 수 있는 것은 부모의 유골이나마 좋은 곳에 모시는 것임을 깨닫고 풍수지리를 공부하여 풍수에 통달하게 되었다. 그래서 부모의 유골을 모실 곳을 찾던 중 순창군 복흥에 대혈(大穴)이 많은 것을 알고 순창 복흥방의 조동으로 이사하였다. 기재우는 풍수지리학상 길지라고 하는 황앵탁목혈(黃鶯啄木穴)에 부모를 모시게 되었다. 이후 10년 후에 노사 기정진을 얻게 된 것이다.

    기정진이 태어나던 날 아버지 기재우는 아기의 울음소리를 듣고 하녀에게 “딸이냐, 사내냐”라고 물었다. 하녀는 “옥동자입니다.” 하였다. “아무런 탈이 없더냐?”라고 다시 묻자 “아무 탈이 없는 옥동자입니다.”라고 하녀가 대답했다. 이 말은 들은 기재우는 사랑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두문불출하였다. 영문을 알 수 없는 권씨 부인은 안절부절못하였다. 40이 넘어 아들을 낳았으니 칭찬을 받아 마땅한데 오히려 남편의 얼굴조차 볼 수 없으니 남편의 내심을 모르는 입장에서 권씨의 마음은 편안할 수가 없었다.

    아들을 낳은 후 7일이 된 날 아침, 초이레에 삼신에 제사하기 위하여 방 청소를 하던 하녀는 그만 잘못하여 벽에 걸어 놓은 가락을 떨어뜨렸는데 그것이 아기의 눈에 떨어졌다. 아기가 죽을 듯이 울어대자 사랑방에서 두문불출하던 기재우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하녀는 거의 죽어 가는 목소리로 아기가 눈을 다쳤다고 하였다. 그러자 7일간을 방에서 나오지 않았던 기재우는 사랑방 문을 박차고 뛰어 나오며 “이젠 됐다. 별일 없을 것이니 조용히 하거라.”라고는 희색이 만면하였다. 이 모습을 본 권씨 부인은 기가 막혔다. 두문불출하던 남편이 아기를 낳은 지 7일 만에 나와서는 눈을 다친 아기를 보고는 아무 일도 없으니 조용히 하라고 하니 어찌 기가 막히지 않겠는가. 그나마 다친 아기를 부인 탓으로 돌리지 않은 것만을 다행으로 여겼다. 그러나 기재우로서는 30년 고생하여 황앵탁목혈을 구하여 어머니께 효도하였다는 기쁨과, 그 결과로 한쪽 눈이 먼 자식을 얻었으니 그 이상 기쁠 수가 없었던 것이다.


  • 3모티프 분석
    「노사 기정진의 출생 설화」의 주요 모티프는 ‘명당 발복’이다. 명당을 찾아 묫자리나 집터를 잡으면 후손이 번창하고 가문이 영광을 받게 된다는 풍수지리는 오랜 세월 동안 민간 신앙으로 여겨져 왔다. 그래서 높은 관직에 오르거나 명문가의 사람에 대한 뒷이야기에는 명당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많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조선의 대유학자 기정진의 출생과 관련된 「노사 기정진의 출생 설화」도 ‘명당 발복’ 모티프에 기반하고 있다. 풍수를 공부한 기재우가 명당자리를 찾아 부모의 묘를 앉혔고, 이로 인해 노사 기정진이 대유학자가 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런 명당 발복담은 훌륭한 사람에 대한 신비성을 더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노사 기정진의 출생 설화」 [蘆沙奇正鎭-出生說話]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제공처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www.aks.ac.kr

기정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1자 대중(大中), 호 노사(蘆沙), 시호 문간(文簡)

    1798년(정조 22)∼1879년(고종 16). 조선 후기의 학자.

    전라북도 순창 출신. 본관은 행주(幸州). 초명은 기금사(奇金賜), 자는 대중(大中), 호는 노사(蘆沙). 판중추부사기건(奇虔)의 후손이고, 아버지는 기재우(奇在祐)이며, 어머니는 안동 권씨로 권덕언(權德彦)의 딸이다.
    성리학에 대한 독자적인 궁리와 사색을 통하여 이일분수(理一分殊) 이론에 의한 독창적인 이(理)의 철학을 수립하였다.

  • 2생애 및 활동사항
    1815년(순조 15) 양친을 여의고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장성 하남(河南)으로 이사하였다. 1828년향시에 응시하고, 1831년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이후 명성이 조정에 알려져 1832년강릉참봉(康陵參奉)이 주어졌고, 1835년(현종 1)에는 다시 현릉참봉(顯陵參奉)이 주어졌으며, 1837년에는 유일(遺逸: 학식과 덕망이 높아 과거를 거치지 않고 높은 관직에 임명될 수 있는 학자)로 천거되어 사옹원주부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의를 표하였다.
    1842년 전설사별제(典設司別提)로 임명되었으나 취임 6일 만에 병을 핑계 삼아 사임하고 귀향하였다. 얼마 뒤 평안도도사, 1857년 무장현감, 1861년사헌부장령, 1864년사헌부집의 등에 임명되었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1862년(철종 13) 임술민란이 일어나자, 「임술의책(壬戌擬策)」을 써서 삼정(三政)의 폐단을 지적하고 이를 바로잡을 방책을 제시하려 하였으나, 소장의 말미에 이름을 쓰고 과거시험의 답안지처럼 봉하라는 조정의 지시로 인해 상소할 것을 포기하였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서양세력의 침략을 염려하여 그 해 7월 「육조소(六條疏)」라 불리는 첫 번째 「병인소(丙寅疏)」를 올렸다. 그 내용은 외침에 대한 방비책으로 여섯 가지를 제시하고, 민족 주체성의 확립을 주장한 것으로 당시의 쇄국정책과 보조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후에 나타나는 위정척사(衛正斥邪)의 사상은 이 소장에 이론적 기초를 두고 있다.
    이 소장이 고종에게 받아들여지고, 조정에서 그의 식견이 높이 평가되어 그 해 6월 사헌부집의, 7월에는 동부승지, 8월에는 호조참의, 10월에는 가선대부의 품계와 함께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그는 동지돈녕부사에 임명되자 이를 사양하는 두 번째 「병인소」를 올렸다. 여기에서는 당시의 국가적 폐습을 준엄하게 비판하고, 지도층인 사대부에게 청렴결백한 기풍이 없음을 우려해 삼무사(三無私: 공자가 사심이 없는 세 가지에 대해 말한 것으로 하늘, 땅, 해와 달처럼 사심 없이 천하를 위해 봉사하는 일. 곧 지극히 공평한 것을 지칭함)를 권장하도록 강조하였다.
    이어서 공조참판·경연특진관(經筵特進官)에 위촉되었으나 사양하였고, 1877년 우로전(優老典: 나이 많은 사람에게 대우하여 내리는 벼슬)으로 가의대부(嘉義大夫)가 주어졌다. 그 해에 장성 하리 월송( 月松: 지금의 진원면 고산리)으로 이사하였으며, 이듬 해 그곳에 담대헌(澹對軒)이라는 정사를 짓고 많은 문인과 함께 거처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 3학문세계와 저서
    그의 학문은 스승으로부터 직접 전수받거나 어느 학파에 연원을 둔 것이 아니라, 송대의 학자 주돈이(周敦頤)·장재(張載)·정호(程顥)·정이(程頤)·주희(朱熹) 등의 성리학에 대한 독자적인 궁리와 사색에 의해 완성되었다. 이를 통해 이황(李滉)·이이(李珥) 이후 약 300년간 계속된 주리(主理)·주기(主氣)의 논쟁을 극복하고, 이일분수(理一分殊)의 이론에 의한 독창적인 이(理)의 철학체계를 수립하였다.
    그의 철학사상은 우주의 구성에서부터 인간의 본질에 대한 해명, 사단칠정과 인심도심(人心道心) 등 심성의 문제, 인물성동이(人物性同異)의 문제, 선악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이일분수(理一分殊)라는 이체이용(理體理用)의 논리로 일관되어 있다. 그리하여 그는 우주현상을 이와 기로 설명하던 이기이원관(理氣二元觀)을 극복하고, 인간심성 내지 도덕의 문제를 가치상 우위에 있는 이의 작용으로 해명하고자 했다. 또한 인물성동이의 문제 역시 이의 완전·불완전으로 설명하여 종래의 주리 또는 주기의 심성론과 인물성동이론을 종합하였다.
    그는 저술은 많지 않지만 성리학사상 중요한 저술들을 남겼다. 『태극도설(太極圖說)』에 나오는 ‘정(定)’자에 대한 해설인 「정자설(定字說)」, 사단칠정(四端七情)을 논한 『우기(偶記)』(1845), 이기(理氣) 및 이이의 「이통기국설(理通氣局說)」에 대해 평론한 「이통설(理通說)」(1852), 그의 철학에서 핵심이 되는 「납량사의(納凉私議)」(1874, 초고는 1843년에 작성)와 「외필(猥筆)」(1878) 등이 대표적인 저술이다. 그의 철학사상은 제자들과의 문답을 기록한 『답문유편(答問類編)』에도 잘 드러나 있다.
    그의 학문과 사상은 손자인 우만(宇萬)과 김녹휴(金錄休)·조성가(趙性家)·정재규(鄭載圭)·이희석(李僖錫)·이최선(李最善)·기삼연(奇參衍) 등의 제자에게 전수되었으며, 많은 학자들이 그의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저서로는 1882년 『노사집』, 1890년 『답문유편』이 편집되어, 담대헌에서 활자본으로 간행되었고, 1902년 경상남도 단성(지금의 합천군 쌍백면 묵리) 신안정사(新安精舍)에서 목판본으로 간행되었으며, 1976년 서울에서 영인본으로 출간되었다.


  • 4상훈과 추모
    1892년 조성가가 행장을, 1901년에는 최익현(崔益鉉)이 신도비문을, 1906년에는 정재규가 묘갈명을 지었다. 1927년 고산서원(高山書院)이 건립되어 그 사우에 조성가 등 문인 6인과 함께 봉안되었고,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낸다. 1960년 『노사연원록(蘆沙淵源錄)』, 1968년 『고산서원지(高山書院誌)』가 간행되었으며, 1978년 고산서원 장판각(藏板閣)이 준공되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참고문헌
    • 『노사집(蘆沙集)』
    • 『노백헌문집(老柏軒文集)』
    • 『송사문집(松沙文集)』
    • 『조선유교연원(朝鮮儒敎淵源)』
    • 『한국사연구입문(韓國史硏究入門)』(한국사연구회 편, 1981)
    • 『한국유학사(韓國儒學史)』(배종호, 연세대학교출판부, 1974)
    • 『조선유학사(朝鮮儒學史)』(현상윤, 민중서관, 1949)


    기정진 [奇正鎭]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기정진(역대 서화가사전)

조선 후기~말기의 학자이자 서예가이다. 자는 대중(大中), 호는 노사(蘆沙), 본관은 행주(幸州)이며, 초명은 금사(金賜)이다. 판중추부사 기건(奇虔)의 후손이며, 부친은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追贈)된 기재우(奇在祐), 모친은 안동권씨 권덕언(權德彦)의 딸이다.

10세 때에는 이미 『대학연의(大學衍義)』를 비롯하여 경사백가서(經史百家書)에 통달하게 되어 신동이라고 불렸고, 11세에 지었다는 「춘추정기(春秋亭記)」는 노학자도 짓기 어려울 만큼의 높은 수준의 글이었다고 한다. 1815년 18세에 양친을 여의고 전북 순창(淳昌)에서 장성 하남(河南)으로 이사하여 몇 차례 집을 옮기며 살았고, 산사에 들어가 정좌하여 독서와 사색의 삼매경에 들기도 하였다.

부친의 유언에 따라 1828년 31세로 향시에 응시하였고, 1831년에 사마시(司馬試)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으며, 이듬 해 강릉참봉(康陵參奉)을 시작으로 1835년에는 현릉참봉(顯陵參奉), 1837년에는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사옹원주부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의를 표하였다. 1842년 45세 때는 전설사별제(典設司別提)로 임명되자 취임 6일 만에 칭병으로 사임하여 귀향하였다. 60세에 내려진 고향 근처의 무장(茂長) 현감의 벼슬도 완곡하게 거절하였다.

1862년 임술민란이 일어나자, 「임술의책(壬戌擬策)」을 써서 삼정(三政)의 폐단을 지적하였다.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서양세력의 침투를 염려한 끝에 그해 7월 「육조소(六條疏)」라 불리는 첫 번째 「병인소(丙寅疏)」를 올려, 외적을 방비하는 대책을 건의하였다. 이 후에 나타나는 위정척사(衛正斥邪)의 사상은 이 소에 이론적 기초를 두고 있었다.

이 소는 고종에게 받아들여지고, 조정에서는 식견이 높이 평가되어 사헌부집의 · 동부승지 · 호조참의 · 가선대부의 품계와 함께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 등이 주어졌다. 그러나 이를 사양하고, 국가적 폐습을 비판하고 사대부에게 삼무사(三無私)를 권장하는 두 번째 「병인소」를 올렸다. 이어 공조참판 · 경연특진관(經筵特進官)에 위촉되었으나 사양하였고, 79세에는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1877년 장성으로 거처를 옮겨 담대헌(澹對軒)에서 문인들과 지내다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문간(文簡)으로, 조성가(趙性家)가 행장을, 면암(勉岩) 최익현(崔益鉉)이 신도비문을, 정재규가 묘갈명을 지었다. 고산서원(高山書院)에 조성가 등 문인 6인과 함께 봉안되었다. 이황 · 이이 · 서경덕 · 임성주(任聖周) · 이진상(李震相)과 더불어 조선 성리학자 6대가(大家)로 칭해진다. 학문과 사상은 손자인 기우만(宇萬)과 노문3자(蘆門三子)라 일컫는 김석귀(金錫龜) · 정의림(鄭義林) · 정재규(鄭載圭)를 비롯하여, 김녹휴(金錄休) · 기문현(奇文鉉) · 조성가(趙性家) · 이희석(李僖錫) · 이최선(李最善) · 기삼연(奇參衍) · 조의곤(曺毅坤) 등의 노사학파 제자에게 전수되었다. 그밖에도 많은 지인들에게 보낸 간찰을 비롯한 서간과 『어안집(魚雁集)』 중의 글씨, 그리고 상소문 등이 전한다.

집필자
강혜진(서예)

주요 작품
간찰(윤석사에게), 서간
기정진 [奇正鎭] (한국 역대 서화가 사전, 2011. 11. 28.)